‘캐스터네츠 썬데이’ - 정끝별 (1964∼)
‘캐스터네츠 썬데이’ - 정끝별 (1964∼)
오라는 데는 없고 갈 데도 없고 일어나기는 싫고 이미 허리는 끊어질 것만 같은데 벌써 오후 세시예요
아랫배가 캐스터네츠처럼 벌어졌어요
딱 딱 딱 꾸꾸루꾸꾸 빈 뱃 속의 노래
이제 뒤꿈치를 높이 쳐들고 나서야 해요
허리를 활처럼 당겨 뜨거운 플라맹고를 추며
팝콘처럼 톡톡 튀는 세븐업을 사들고
오후 세시 캐스터네츠는 꾸꾸루꾸꾸
노래만 부르다가는 배꼽은 뚫리고 말 거예요
오라는 데는 없고 갈 데도 없고 일어나기는 싫고 이미 허리는 끊어질 것만 같은데 벌써 오후 세시예요
온 생의 써니 썬데이를 출 거예요
새들을 털어내는 가지처럼 기지캐를 켜고
발꿈치마다 도주의 박차를 달고
당신의 썬데이를 떠받치고 선
잔뜩 힘이 드러간 위태로운 발끝을
캐스터네츠는 언제나 입을 벌리고
따라락 딱 딱 꾸꾸루꾸꾸 튀어오를 수 있을까
캐스터네츠 썬데이, 건너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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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마르셀은 인간을 약속하는 동물로 정의했다. 우울이 깊으면 나가기 싫어진다. 약속을 깨기 다반사다. 약속을 깨니 ‘오라는 데’도, ‘갈 데’도 점점 줄어든다. ‘갈 데’를 완전히 없애는 게 우울의 최종 목표다. 우울은 배고픔도 즐거이 견디게 하나. 꼬르륵 소리가 ‘딱딱 꾸꾸루꾸꾸’ 캐스터네츠 타악기 소리로 변주됐다. 시인은 “허리를 활처럼 당겨 뜨거운 플라멩꼬”를 춘다. 우울, 혹은 배고픔도 예술로 승화시키는 예술가적 삶. 호메로스는 “굶어 죽는 것이 제일로 처참한 법”이라 했다. <박찬일·시인>
‘그린마일― 달팽이’ - 이귀영(1949~ )
어떤 일상의 일상
늘 마지막 날 늘 최고의 날 눈이 가는 만큼
누구의 구둣발에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순간을 지고 산다.
천년의 무게를 지고 풀잎에 잠깐 풀칼에 잠깐 멈추어 속살로 산다.
한 닢의 지구 뒤에 숨어 쇼생크 감옥 장기수들처럼
나는 결백하다고 말하지 않겠다.
어떤 비오는 날, 어떤 개화, 어떤 눈물, 어떤 만남…
어떤 모든 순간은 이별의 절정
나는 천천히 천천히 속살을 다 끄집어내어
모든 은유를 핥으며 흔적을 지우며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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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마일은 사형수가 감방에서 사형 집행장까지 걷는 길. 한계상황의 길. 살아있는 것은 모두 그린마일을 걷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통한다. ‘결백’한 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린마일은 결백하지 않은 자들만 선택하지 않는다. ‘모든 순간은 이별의 절정’이라고 한 것이 예사롭지 않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로 시작해서 ‘더 열심히 그 순간을/사랑할 것을’로 끝나는 정현종의 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과 같은 것은 ‘현재’ 긍정에 대한 요구, 다른 것은 어조(語調). 정현종의 경우는 영탄 및 탄식의 어조. 이귀영의 경우는 담대함의 어조. ‘흔적을 지우며 간다’로 끝내고 있다. <박찬일·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