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연기 - 김수영(1921-1968)
~Wonderful World
2012. 1. 6. 13:43
연기 - 김수영(1921-1968)
연기는 누구를 위하여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해발 이천육백척의 고지에서
지렁이같이 꿈틀거리는 바닷바람이 무섭다고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놈
숫자를 무시하고 사는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오래된 연기
자의식에 지친 내가 너를
막상 좋아한다손 치더라도
네가 나에게 보이고 있는 시간이란
네가 달아나는 시간밖에는 없다
평화와 조화를 원하는 것이
아닌 현실의 선수
백화가 만발한 언덕 저편에
부처의 심사같은 굴뚝이 허옇고
그 우에서 내뿜는 연기는
얼핏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연기의 정체는 없어지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꽃밭 넘어서
짓궂게 짓궂게 없어져보려는
심술맞은 연기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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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하여 일을 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연기, 구름을 향하여 도망하는 연기, 달아나는 시간 동안만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는 연기, 없어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연기, 축구 선수처럼 연기도 현실의 선수들, 적응하려고 애쓰면서 자신이 머무는 곳을 충만하게 채우고 싶어하는 연기, 그러다가도 허망해져서 어느덧 손 놓고 날아가는 연기,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을 채근하던 김수영 시인이 쳐다보던 저 연기.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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