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불타는 집 - 장정일(1962~)
~Wonderful World
2012. 1. 12. 16:45
불타는 집 - 장정일(1962~)
집이 불타고 있었다.
먼저 온 고참들의 여섯 개째 운동화를 빨아 헹굴 때
우리 살던 옛집 지붕이 불타고 있었다.
고름처럼 가늘게 수돗물이 흘러나오고
두 손이 하얗게 얼어터진 겨울 저녁
집이 불타고 있었다.
철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활활활
세찬 바람에 사그러졌다.
어머니, 당신 아이는 소년원에 갇혀 있어요
매일 고참들의 신발을 빨아 헹구며
(중략)
방주 같은 운동화를 빨아 헹구는 겨울 저녁
철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불타고 있었다.
수돗물은 가늘게 흘러나오고
몸은 움직일 수 없는데
어머니 집이 불타요. 어머니
용서하세요, 저는 제 몸을 작살내기로
결심을 해요. 여섯 개 운동화에
여섯 조각낸 몸뚱이를 숨기고,
물을 가득 싣고,
무지개 밟은 듯 흐르는 비눗물 타고,
아이는 철창 밖으로 달아나요.
숱한 감시의 눈을 뚫고 몰래 나가요
불타는 집을 끄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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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철창에 가둔다고 못 가나. 우리 옛집이, 당신을 향한 마음이, 불타는데 막는다고 못 가나. 드릴로 벽을 뚫지 않더라도, 내 몸뚱이 작살내고 마음 갈갈이 찢어 운동화에 싣고 비눗물에 미끄러지며 철창 사이로 빠져나갈 수 있다. 마음은 아무도 못 가둔다. 가두면 마음은 비눗물 환상을 타고 삼팔선도 지하벙커도 다 뚫는다. <최정례·시인>
불타는 집 - 장정일(1962~).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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