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두 눈과 귀 틀어막다 - 이문재(1959~ )

~Wonderful World 2012. 4. 23. 15:29

두 눈과 귀 틀어막다 - 이문재(1959~ )



그렇다,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이것은

인격이 아니다, 먼 기억도 아니고 책갈피도

아니다, 바람에 뒤켠을 들키는

여름나무의 잎사귀처럼 나를 한순간

뒤집는 것도 불현듯 길을 막아서던

옛사랑이 아니다

이 도시이다, 도처에서

이 도시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란 이 도시의 중얼거림과 속삭임

담화문과 스파트뉴스 사이일 뿐이다

죽음이란 도시와의 대화에서 제외되는 것일 뿐


우리가 이 도시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두 눈과 귀를 열게 한 뒤 이 도시가

우리를 끊임없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도시가 내미는 이 희고 고운 손들을

조심하라, 관능은 죽음과 가장 가까운

풍경인 것, 세련은 이미 무수한 죽임 위에

버티고 선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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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발로 이 도시를 걸어 다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었다. 이 도시가 내 눈을 감을 수 없게 만들고, 우리의 욕망을 휘황하게 전시하여 나를 걸신들린 거지로 만든다. 이 도시가 무방비인 내게 희고 고운 손을 내밀며 관능의 몸짓으로 날 유혹한다. 죽음의 얼굴을 감추고, 정육점에 매달린 고깃덩어리조차 세련되게 포장해서 전시해 놓고는 끝없이 욕망하라고, 내 눈과 귀를 닫지 못하게 한다.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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