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없어요-김이듬(1968~)
사과 없어요 - 김이듬(1968~ )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
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
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
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
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달
라고 할까,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쫓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
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
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
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
집어쓴 적이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
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한 후 제거되고 추
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쟤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는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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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면 진다. 사과는 잘못한 놈이 아니라 약한 놈이 하는 거니까. 이기려면 우겨야 한다. 물을 타야 한다. 그래야 명백한 사실관계도 난해한 진실 공방으로 바뀌니까. 시빗거리보다 정작 시비가 더 커졌을 때의 스트레스는 아무나 견디는 게 아니니까. 싸우기 싫어 사과하면, 덮어쓰고 욕먹고 응징당한다. 사과는 무섭다. 이래서 사소한 일상도 실존적 고뇌를 요구한다. 아아, 아아… 전전긍긍을 요구한다. 사과는 사실을 사실로 돌려놓는 일. 덜컥, 내려앉은 심장을 다시 주워드는 일. 이게 잘 안 된다. 무지렁이들끼리 사과 좀 하고 좀 봐주고 살면 얼마나 좋아. 그러면 괜찮아요, 그냥 먹을게요, 저 사실 삼선짜장면도 좋아해요, 전복도 다진 야채도 맛있게 먹어줄 텐데. 사과 좀 한다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닐 텐데. 아랫것들 탓으로 돌리느라, 역사의 판단에 맡기느라 바쁜 몸들도 아니면서.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