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이근화(1976~)

~Wonderful World 2012. 8. 3. 16:21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 이근화(1976~ ) 호박죽 포장을 들고 있었다 오토바이가 쓰러졌고 한참을 미끄러져 나갔다 쿵 소리가 먼저였던가 계산하던 아줌마가 영수증을 건네주다 놀라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아이고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하나 헬멧을 벗은 사람은 초로의 남자였다 오토바이 밑에 깔린 다리를 빼지 못했다 설탕 트럭을 피하려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걸까 트럭 운전수가 오토바이를 들어올렸다 사람들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경찰서인지 병원인지 모를 곳으로 손가락을 놀렸다 호박죽은 식어 가는데 죽집 아줌마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가야 하는데 혈압이 오르락내리락 엄마한테 가야 하는데 (중략) 아줌마 제발 이 손 좀 놔주세요, 말하지 못했다 죽은 식어 가는데 엄마가 오르락내리락 기다리는데 남자의 죽은 누가 포장해갈지 빚쟁이 딸이 있으면 어떡해 달콤하지 않은 걱정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고와 재난은 우연을 가장하고 오지만, 거듭되는 우연에는 주검에서 혼이 나오듯 어두운 필연의 그림자가 생겨난다. 충돌음과 거짓말처럼 쓰러지는 오토바이가 죽집 계산대 앞의 시간을 잡아당겨 주욱 늘여놓는다. 이 슬로비디오 속에서 정지된 듯 움직이는 현장풍경과 안타깝게 떠오른 말들은 판단과 행동에 이르지 못하고 툭툭 끊어져 미끄러진다. 그러니 이 순간에 수습이란 없다. 이 시는 이렇게 삶이라는 지뢰밭이 베푼 충격 자체를, 충격에 대한 무의식의 반응을 단속적으로 찍어 보여준다. <이영광·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