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 이상국(1946~ )

~Wonderful World 2012. 8. 7. 22:00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 이상국(1946~ )


그전에, 많이 아픈 사람이 꼭 새벽에 전화했다

너무 아파서 시인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한두 해 지나자 전화가 끊겼다


늘 죽고 싶다던 그 사람

죽었을까

털고 일어났을까

몇 년째 감옥에 있는 사람이

오랫동안 시를 써 보내왔다


양면 괘지에 희미하게

새 발자국 같은 시를 찍어 보내며

벌거벗은 것처럼

마음을 들킨 것처럼

부끄럽다고 했는데


우리가 살면서 누군가

좀 들여다봐주었으면 하는

혹은 아무 욕심도 없는 마음

그런 게 시라면

나는 시를 너무 함부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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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의지한 윤리 가운데 하나는 그가 누군가를 대신해 말한다는 것 아닐까. 그러다가 어느 때는 제 입을 그 누군가가 빌려 말한다는 느낌에 닿기도 하는 것 아닐까. 대신(代身)이라는 점에서 그는 얼마간 사제를 닮았다. 사제의 길과 시인의 길은 어느 험로에선가 갈라지겠지만, 대신 아프고 대신 슬픈 몸을 지녀야 시인은 아픈 이와 갇힌 이의 긴 얘기를 들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말, 그 마음 말고 아무런 욕심도 없는 말이란, 말이 되지 않을 도리가 없는 말일 것이다. 다 벗어 부끄러운 그 말과 글의 뿌리가 고통을 움켜쥐고 있기에 진실이라고, 그 고백의 간절함 곁에 나란히 서기란 어렵다고 시인은 탄식하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 시’라는 숙연한 피력이 숨은 고백이 되어 이 시를 받쳐주고 있다. <이영광·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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