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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 아래-전동균(1962~)

~Wonderful World 2012. 9. 30. 01:26

초승달 아래 - 전동균(1962~ )

 

떠돌고 떠돌다가 여기까지 왔는데요

 

저문 등명 바다 어찌 이리 순한지

 

솔밭 앞에 들어온 물결들은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까지,

 

솔방울 속에 앉아 있는

 

민박집 밥 끓는 소리까지 다 들려주는데요

 

그 소리 끊어진 자리에서

 

새파란, 귀가 새파란 적막을 안고

 

초승달이 돋았는데요

 

막버스가 왔습니다 헐렁한 스웨터 입은 여자가 내려,

 

강릉장에서 산 플라스틱 그릇을 딸그락 딸그락거리며 내 앞을 지나갑니다

 

어디 갈 데 없으면, 차라리

 

살림이나 차리자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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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막장에 이르러, 마음이 순한 물결과 같을 때가 있다. 솔밭 앞의 물결들과,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민박집 밥 끓는 소리는 그래서 그 마음의 물결에 겹쳐 하나의 물결, 하나의 소리를 이루는 것이다. 그 마음의 넘실거리는 물결 위로 귀때기 새파란 초승달이 가을 상추 싹처럼 돋을 때가 있다. 짊어지고 온 것 내려놓고, 새살림을 차리고 싶은 시간이다. 싸구려 플라스틱 그릇 딸그락거리는 헐거운 삶을 그것 그대로 바라보며 받아들이게 되는 시간. 그런 시간과 만나면 또 얼마간 살아갈 수 있다. 거기서 삶의 면목의 한 귀퉁이를 엿본 까닭일까. 돌아보면, 헐렁한 스웨터를 입은 여자가 곧 나와 함께 살자고 한 바로 그 여자였다. [장철문·시인·순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