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단풍-박형준(1966~)
~Wonderful World
2012. 10. 4. 03:21
단풍 - 박형준(1966~ )
바람과 서리에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들어 있다 무덤을 지키고 선 나무 한 그루, 저녁 햇살에 빛나며 단풍잎을 떨어뜨린다 자식도 덮어주지 못한 이불을, 속에 것 다 비워 덮어준다 무덤 아래 밭이 있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는데 종아리에 불끈 일어선 정맥처럼 혼자 자라 시퍼렇게 빛나는 무 잎사귀
----------------------------------------------------------------------------------------------
그리운 사람의 이름은 ‘부재’다. 지금 여기 내 곁에 없다. 내가 그의 곁에 갈 수 없고, 그가 내 곁에 올 수 없다. 없음, 그것이 그의 존재 형식이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그가 된다. 그래서 모든 것은 곧 그의 부재의 기호가 된다. 무덤가의 단풍나무는 그를 닮았다. “속을 다 내주고 물들 대로 물든” 사람, “저녁 햇살에 빛나며” 단풍잎처럼 떨어진 사람. 내가 그를 위해 덮어주지 못한 이불을 대신 덮어주는 단풍나무가 곧 그다. 몸 없는 그가 단풍나무의 몸을 입었고, 마음이 없는 그가 나의 마음을 입었다. 그가 돌보지 않는 밭에, 그의 “종아리에 불끈 일어선 정맥처럼” “시퍼렇게 빛나는 무 잎사귀”는 그의 부재의 기호다.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의 부재의 기호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그의 잎사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부재의 기호로서 시퍼렇게 혼자 자란다. (장철문·시인·순천대교수)
단풍.hwp
0.05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