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자수도원
복자수도원'-이진명(1955~ )
내 산책의 끝에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복자수도원은 길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붉은 벽돌집이다
그 벽돌빛은 바랬고
창문들의 창살에 칠한 흰빛도 여위었다
한낮에도 그 창문 열리지 않고
그이들 중 한 사람도 마당에 나와 서성인 것 본 적 없다
둥그스름하게 올린 지붕 위에는 드문드문 잡풀이 자라 흔들렸고
지붕 밑으로 비둘기집이 기울었다
잠깐이라도 열린 것 본 적 없는 높다란 대문 돌기둥에는
순교복자수도회수도원(殉敎福者修道會修道院)이라 새겨진 글씨 흐릿했다
그이들은 그이들끼리 모여 산다 한다
저녁 어스름 때면 모두
성의(聖衣)자락을 끌며 긴 복도를 나란히 지나간다고 한다
비스듬히 올라간 담 끄트머리에는 녹슨 외짝문이 있는데
삐긋이 열려 있기도 했다
숨죽여 들여다보면
크낙한 목련나무가 복자수도원, 그 온몸을 다 가렸다
내 산책의 끝에는 언제나 없는 복자수도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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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가 그랬지. 램프의 별로 밝혀진 외딴집이 아무리 우주적인 이미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스스로를 고독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녹슨 외짝문이 삐긋이 열려 있는, '복자'라는 이름을 가진 수도원. 우리들 삶의 산책에는 복도에서 성의(聖衣) 끌리는 소리만 들리는, 상상력의 파동을 방사하는 이렇듯 고독한 침묵의 소리가 있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박형준ㆍ시인> 2008.03.10 00:46 입력 / 2008.03.10 03:21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