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것들 - 황지우(1952~ )
두고 온 것들 - 황지우(1952~ )
반갑게 악수하고 마주앉은 자의 이름이 안 떠올라
건성으로 아는 체하며, 미안할까봐, 대충대충 화답하는 동안
나는 기실 그 빈말들한테 미안해,
창문을 좀 열어두려고 일어난다.
신이문역으로 전철이 들어오고, 그도 눈치챘으리라,
또 다시 핸드폰이 울리고, 그가 돌아간 뒤
방금 들은 식당이름도 돌아서면 까먹는데
나에게 지워진 사람들, 주소도 안 떠오르는 거리들, 약속 장소와 날짜들,
부끄러워해야 할 것들, 지켰어야 했던 것들과 갚아야 할 것들;
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세상에다가 그냥 두고 왔을꼬!
어느 날 내가 살었는지 안 살었는지도 모를 삶이여
좀 더 곁에 있어줬어야 할 사람,
이별을 깨끗하게 못해준 사람,
아니라고 하지만 뭔가 기대를 했을 사람을
그냥 두고 온
거기, 訃告도 닿을 수 없는 그곳에
제주 風蘭 한 점 배달시키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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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랴. 잊혀진 것들, 두고 온 사람들이 ‘풍란 한 점’ 부쳐줄 주소를 갖고 있다 한들 어찌하랴. 거기까지 갈 수 있는 택배사도, 우체부의 빨간 자전거도 없는 것을. 그것은 장소가 아니라 사라져간 시간인 것을. 어쩌면 사라진 것은 그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새겨둔 마음의 망점(網點)이요,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망점에 새겨진 그 사람과의 시간인 것을. 그러나 또 어찌하랴. 내 것이 아닌, 내가 아닌 이 마음의 망점들과 망점에 새겨둔 것들을. 낡은 퍼즐 조각처럼 떨어져나가는 망점들을. 내가 아닌, 내 것이 아닌 나를. [장철문·시인·순천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