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우울 13-위층 사람 - 김승희(1951~ )
서울의 우울 13-위층 사람 - 김승희(1951~ )
당신은 지금 나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십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지 마시고
천상천하 유타공존 하십시오.
당신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
소리 내지 않는 그분을 상기하십시오.
당신의 머리통 위의 발바닥을
당신의 발바닥 아래의 머리통을
그렇게 그윽이 생각하면서
함께 물망초 꽃으로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아니요
아니요
물망초 꽃이 아니라 아예 나를 잊으라는 망초꽃으로
조용한 망초꽃으로
너영나영 아득히 피어나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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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김기림이 일찍이 예언한 대로 도시의 아이들이 되었다. 빽빽한 좁은 땅덩이 위로 층층이 쌓아올린 삶, 끝없이 누군가와 경쟁하고 나아가 절대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나 자신과도 끝없이 싸우고 경쟁하기를 서슴지 않는 피로사회가 우울한 도시 서울의 모습이다. 빌딩에서, 아파트에서 나는 누군가의 머리통을 밟고 선 위층 사람이 되고 동시에 누군가의 발에 머리통을 밟힌 아래층 사람이 되어 산다. 하지만 뗄래야 뗄 수 없는 이 관계성 속에서 우리의 삶은 점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이기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위층 사람의 발소리가 내겐 참을 수 없는 소음이 되지만, 나의 미세한 움직임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아래층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도시의 삶, 불의는 참을 수 있어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는 시대에 6년 만에 아홉 번째 시집을 묶은 시인은 말한다. ‘당신의 하늘을 밟고 서 계시나/소리 내지 않는 그분을 상기하’라고. 도시의 삶은 누군가의 물망초 꽃으로 혹은 망초꽃으로 유타공존하는 것이라고. 속물적인 내가 더없이 부끄러운 아침이다. <곽효환·시인·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