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폐허 이후-도종환(1954~)

~Wonderful World 2013. 4. 2. 05:12

폐허 이후 -도종환(1954~ )

 

 

사막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는 풀들이 있고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서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는 나무가 있다

화산재에 덮이고 용암에 녹은 산기슭에도

살아서 재를 털며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이 있다

내가 나를 버리면 거기 아무도 없지만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나 함께 있는 것들이 있다

돌무더기에 덮여 메말라버린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만들어 흘러간다

내가 나를 먼저 포기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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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벽이라고 할 때, 하여 더는 갈 수 없다고 절망할 때 소리 없이 벽을 넘는 사람, 그가 도종환이다. 젖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세상의 그 어떤 꽃들도 젖으며 흔들리며 피었기에 더 아름답고 그런 삶이 따뜻하다는 믿음으로 그는 가파른 시대를 한결같이 살아왔다. 그 중심에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다. 사막과 불타버린 숲에서도 살아 있는 풀과 나무, 화산이 폭발한 산기슭에서도 살아 돌아오는 벌레와 짐승의 강인한 생명력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함께하는 것들이 있고, 폐허의 골짜기에 다시 물이 고이고 물줄기를 이루어 흘러간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전언이다. 그런 그가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대도 사막”이라고 그 복판에 뛰어들었다. 가시밖에 없는 사막에 연민과 눈물을 알게 하고 서늘함을 불어넣는 횡단을 마치고 그가 귀환할 것을 나는 믿는다. (곽효환·시인·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