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또랑또랑 걷던 여자
구두 뒤축이 닳아도 또랑또랑 걷던 여자
장딴지에 끓는 물에 덴 자국이 있어
스타킹을 신어야 했던 여자
언제나 치마를 입고 싶었던 여자
그 여자가 들고 가는 가방 속에는
릴케의 시집이 있고
포도줏빛 루주가 들어 있고
주소록과 지갑이 있고
멀리 두고 온 아이 사진 한 장 있고
혼자 점심 먹으러 나온 여자
또랑또랑 김밥 먹으러
학교 뒷문을 빠져나오던 여자
불길한 골목을 걸으면서
찢긴 치마를 여미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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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만 쌓이네’로 인기를 한 몸에 받았던 가수 여진은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도 거부하지 못할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런데 앨범 한 장을 내고선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일설에 의하면, 선생님과 가수 가운데서 하나만을 선택해야 했다고 한다. 학교라는 울타리를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해야 할까? 그녀는 가수가 아니라 여자중학교의 음악 선생님을 당당히 선택했다. 만약 그녀가 학교를 그만두고(꼭 그래야만 했다면!) ‘불길한 골목을 걸으면서’, 음악활동을 했더라면, 당시 가요계의 판도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리는 그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감겨 나오는 슬픈 노래를 들으며 청춘의 방황에 불을 지폈고, 얼굴 없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보거나 더러 키우기도 했다. ‘그리움만 남겨두고 어디로 갔나’, 찾아봐도 없는 것 같아요. ‘이젠 맘이 변해버렸나’, 돌이킬 수는 없나요. ‘그대만을 믿고 살았네’, 허탈해서 더 살 수 없을 것 같아요, 따위의 노래와 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시절의 이야기다.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