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ce-ball - 김중일(1977~ )
Space-ball - 김중일(1977~ )

당신께서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아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이 펜은 너무나 무거워
사랑한단 짧은 엽서를 쓰는 동안
무수한 밤 - 낮이 펜촉에 붙어 회전하였습니다
주어진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여
주소는 이미 지워져 찾을 수 없었습니다
(…)
잉크의 흐름은 세월처럼 빨라 상한 촉 끝으로
검게 떠난 사람들이 잉크 대신 줄줄 새고 있었습니다
오래된 옥상 위로 당신의 펜촉이 반짝거리며 떠서
저의 병을 진단서에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허공에 쓴 제 틀린 시험지 위로
내려 긋는 당신의 완강한 유성(流星)펜을 보았습니다
당신께서 주신 이 펜이 여전히 무거워
당신께 보내는 저의 답장은 항상 늦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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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촉에 잉크를 묻혀 가며 알파벳을 익혔던 영어 시간에 나는 비로소 남녀공학에 배정받은 것이 기꺼운 행운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잉크병을 매번 엎지르거나 흘림체로 몇 글자 적다 말고 노트를 북 찢어내 다시 쓰기를 반복하여 교탁 앞으로 불려나간 얼간이들은 십중팔구 남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남녀가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은 시험에서 좀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 앞대가리는 죄다 여학생들 차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그네들은 정신연령이 우리보다 최소 3년 정도 높았던, 그러니까 누나나 형수뻘쯤 되었던 것이다. 인수분해나 근의 공식의 등장과 함께 수학이 차츰 어려워지기 전까지, 남학생들은 그저 공차기에나 열광하는 호르몬 과다 분비자쯤으로 여겨졌다. 처음 만년필을 선물받던 날, 밤새 글씨 연습을 한 것은 그토록 자주 엎지르던 잉크병이 곁에 없다는 해방감 때문이었을까? <조재룡·문학평론가·고려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