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일러 씨 - 서숙희(1959~ )
나의 보일러 씨 - 서숙희(1959~ )

1
그는 밤이면 버튼 하나로 내게 온다
둥근 털실뭉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볼볼볼
둥글고 부드러운 자음과 모음으로
달큰한 살 냄새로
그가 내 옆에 누우면
적막의 굳은살이 뭉긋이 풀려나고
충혈된 허파꽈리도 명치 아래서 잠든다
2
몸의 길 환히 열리어
나, 그 속에서 오롯한데
누군가에 의해 몸 하나가 덥혀진다는 것
쓸쓸한, 날것의 속성
내 몸의 이 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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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햇살 사이를 오가는 바람인데도 제법 매섭네요. 토라져 심술부리는 얼굴 예쁜 여자아이처럼요. 한겨울 내내 버튼 하나로 내게 와주던 보일러씨를 아직 보내면 안 되겠어요. ‘둥근 털실 뭉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호스를 타고 풀려나오는 온기. 그것으로 꽁꽁 얼었던 지난 겨울밤을 노곤하게 데워주던 고마운 보일러씨. ‘볼볼볼’이란 의성어 같은 의태어로 더 따스하고 정겹게 다가오는 오래된 사랑. 너무 뜨거워 부담스러운 불불불이 되어서도, 너무 차가워 이를 갈아야 하는 벌벌벌이 되어서도, 허리를 껴안아도 아무런 느낌을 주지 못하는 빌빌빌이 되어서도 안 되는, 동글동글, 몽실몽실 만나면 ‘몸의 길 환히 열리어’ ‘그 속에서 오롯’해지는 내게 딱 맞는 사랑. 제대로 만난 자음과 모음의 찰떡궁합. 간혹 봄봄봄으로도 읽히는 ‘볼볼볼’이 이 시조를 사랑스럽게 만듭니다. 볼볼도 아니고 볼볼볼볼도 아닌 ‘볼볼볼’. 삼삼한 3음보라서 더 사랑스럽습니다. 그 3음보로 지어지는 시조라서 더 사랑스럽습니다. <강현덕·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