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죽고 난 뒤의 팬티

~Wonderful World 2014. 4. 5. 07:39

죽고 난 뒤의 팬티 - 오규원(1941~2007)

가벼운 교통사고를 세 번 겪고 난 뒤 나는

겁쟁이가 되었습니다. 시속 80킬로만 가

까워져도 앞좌석의 등받이를 움켜쥐고 언

제 팬티를 갈아입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

기 위하여 재빨리 눈동자를 굴립니다.

산 자(者)도 아닌 죽은 자(者)의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죽고 난 뒤에 팬티가 깨끗

한지 아닌지에 왜 신경이 쓰이는지 그게

뭐가 중요하다고 신경이 쓰이는지 정말

우습기만 합니다. 세상이 우스운 일로 가

득하니 그것이라고 아니 우스울 이유가

없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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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를 가기 며칠 전에 많은 사람은 집안 대청소를 합니다. 평소 잘 닦지 않았던 문틈이나, 가스레인지 주변의 기름때 등을 박박 문지릅니다. 새로 이사 올 사람이 신경 쓰이기 때문입니다. 몸이 안 좋아 수술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그 며칠 전 옷장이며 살림들을 정리합니다. 혹시라도 잘못되어 병원에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신이 떠난 후 남은 살림살이들이 신경 쓰이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교통사고라도 당하면, 그래서 죽게 되면 갈아입지 않았을지도 모를 팬티로 부끄러워질까 봐 걱정합니다. 죽고 난 뒤의 부끄러움, 허물, 그것을 생각합니다. 웃으면서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진지해집니다. 사후, 나는 어떤 평가로 남을 것인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강현덕·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