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 장석주(1955~ )

~Wonderful World 2014. 7. 28. 07:02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 장석주(1955~ )


어렸을 때 내 꿈은 단순했다. 다만

내 몸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싶었다

이 꿈은 늘 배반당했다

난 아버지가 입던 큰 바지를 줄여 입거나

모처럼 시장에서 새로 사온 바지를 입을 때조차

내 몸에 맞는 바지를 입을 수가 없었다. (…)

작은 옷은 곧 못 입게 되지, 하며

어머니는 늘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사오셨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는 나를 짓누른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를 입으면

바지가 내 몸을 입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통 사이로

내 영혼과 인생은 빠져나가버리고

난 염소처럼 어기적거렸다(…)


여름에는 그래도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가 시원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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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통 좁은 홀태 바지가 유행이다. 피부처럼 다리에 짝 달라붙은 스키니 룩 바지를 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저 바지를 입을 때는 다리를 억지로 집어넣으면 되겠지만, 벗을 때는 과연 어떻게 다리를 다시 빼낼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바짓가랑이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통 넓은 힙합 바지를 질질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우습다기보다는 차라리 민망하다.

 몸에 맞고 마음에도 드는 바지를 고르기는 쉽지 않겠지만, 약간 할랑할랑한 바지가 언제나 입기 편하고 보기에 좋을 듯.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