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백지 1 -신달자(1943~ )
~Wonderful World
2014. 8. 11. 11:55
백지 1 -신달자(1943~ )
무쇠같은 분노를 삭이려면
돌덩이 같은 한을 삭이려면
그 곳에 들어가 보세요
들어가도 들어가도 끝이 없는
바닥도 벽도 없이 확 트인
최초의 자연에 정신을 열어 보고 싶다면
백지에 스르르 스며들어서
온 몸이 백지가 되는 황홀을 맛보고 싶다면
세상의 먼지를 깨끗하게 씻어
산 속 샘물 같이 맑아지고 싶다면
다 받아들이고 다 쏟아내는
시리게 깊은 흰 빛(…)
정신의 정신을 만나고 싶다면(…)
새 생명이 태어나면 출생 신고를 하고, 세상을 떠나면 사망 신고를 한다. 인간의 삶과 죽음이 이처럼 종이에 씌어져 남는다. 한 집안의 족보나 한 나라의 역사와 지리도 종이에 기록되어 후세에 전승된다. 종이는 찢어버리거나 태워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종이에 쓴 글이나 인쇄된 서지는 어떤 형태로든 영원히 남는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는 언제나 백지 앞에서 느끼는 고독과 공포가 있다. 젊은 작가라면 아마도 PC 모니터의 새 글 화면 앞에서 그럴 것이다. 백지에 첫 한 줄이 열리는 순간이 정신의 근원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된다. 이른바 ‘타블라 라사(Tabula rasa)’에 정착된 언어와 문자에서 세계의 문학과 학문이 비롯되지 않았는가.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
백지 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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