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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악기 - 허수경(1964~ )

~Wonderful World 2014. 11. 30. 03:22

불우한 악기 - 허수경(1964~ )

불광동 시외버스터미널

초라한 남녀는

술 취해 비 맞고 섰구나

여자가 남자 팔에 기대 노래하는데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이곳에서 차를 타면

일금 이천 원으로 당도할 수 있는 왕릉은 있다네

왕릉 어느 한 켠에 그래, 저 초라를 벗은

젖은 알몸들이

김이 무럭무럭 나도록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불쌍한 눈으로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굴곡진 몸의 능선이 마음의 능선이 되어

왕릉 너머 어디 먼데를 먼저 가서

그림처럼 앉아 있지 않겠는가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먼저 가고 있구나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비에 젖은 초라한 남녀가 서로의 몸에 기대어 부르는 노래. ‘초라’를 벗은 몸으로 서로 엉겨 붙어 무너지다가 문득 서로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이미 그들은 사랑을 연주하는 악기.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불우해서, 불우 속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우리의 불우를 다해 저 먼 곳으로 향하는 희망을 노래하는 악기. <황병승·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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