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유리체를 통과하다 - 고형렬(1954~ )

~Wonderful World 2014. 12. 9. 09:49

 

 

유리체를 통과하다 - 고형렬(1954~ )


눈 밖에 나 있는 존재들

직접 들어올 수 없지만 직립의 낯선 빛은

무한의 깊이로 창을 통과한다

선 채 밑바닥 없이 붙어 염파를 뒤흔든다

빛의 얼굴 밑으로 나는 나를 집어넣으려 한다

조용히 착상하는 피안의 그림자 정원

상공을 건너와, 평면이 되는 빛 바닥

먼지처럼 한번 슥, 얼굴을 쓰다듬지만 손바닥으로

너는 즉시 나의 손등을 비춘다

어떤 간절한 마음도, 앞서 가는 광속의 예언도

너의 빛 위에 놓을 수가 없다

너는 이렇게, 직접 들어오지 않는다

다시 유리체를 통과하고 내 의식체를 비춘 뒤

되돌아 나오는 빛 다발이 수없이 거쳐 가도

우리는 서로 다치지 않는다

나는 이미 너의 오랜 영혼에 매료되었고

창밖에 와 혼자 섰다


물(物)이 구체적이고 동사가 움직이고 형용사가 그리고 부사가 더 그리는 것이 이루는 이야기 말고는 그것 말고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게 없다. 혹시 시인도? 혹시 시인도…. 왜냐면 ‘나는 나를 집어넣으려’ 하지만 ‘너는 이렇게, 직접 들어오지 않는다.’ 시인은 감각 원소(元素)들만으로 갈 수 있는 끝까지, 무심(無心) 너머 무심의 형식에까지 가려 하고, 성공했다. 그 아름다움, 가슴 아파라. <김정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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