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벗는다는 것 - 이채민(1957~ )
~Wonderful World
2015. 8. 27. 03:28
벗는다는 것 - 이채민(1957~ )

잠시 다니러 온 어머니의 몸 씻기려 하는데
어머니는 벗지 않으려 완강하게 버틴다
늙은 여자의 옷 벗기는 일이 이토록 힘이 드는데
남자들은 집에 있는 여자 밖에 있는 여자
젊은 여자 나이 든 여자
때를 놓치지 않고
잘도 벗기고 어루만져
그 덕분에
지구는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왔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가 벗었고
그녀와 내가 벗었고
잘 벗었을 때 평화가 찾아 들더라
여자와 남자가 잘 벗었으므로
지구는 내일도 무사할 것이다
낙원에 살았다는 태초의 사람들은 옷을 입지 않았다 한다.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들의 존재가 순진무구 그 자체였던 까닭이다. 옷을 걸친 것은 실낙원 이후 인류가 겪은 문명화의 결과다. 옷은 취향과 사회적 계급을 드러내는 표지이지만, 그 본질은 문명이 덧씌운 관습이고, 벌거벗은 자아를 가리는 헝겊 갑옷이다. 벗음은 본성적 자아, 태초의 인간으로 돌아간다는 뜻일 테다. 연인들은 옷을 벗고 사랑을 나누는데 옷이 거추장스러운 잉여인 탓이다. “잘도 벗기고 [서로를] 어루만”지는 남자와 여자가 있었음으로 지구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었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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