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가을 근시-김명인(1946~ )
~Wonderful World
2015. 9. 14. 04:42
가을 근시 - 김명인(1946~ )

낭비가 없는 가을 햇살이다
손바닥으로 비벼대는 들판의 이삭들
멍텅구리 배에 옮겨 싣고
하늘 복판까지 흘러가고 싶다
채울 길 없는 허기가 저희끼리
푸른 철벽 가운데로 끌고 나온 낮달
은산을 넘는데 어느새 절량(絶糧)이어서
먹거리로나 앞장세운 삽사릴까?
이미 구름 저만치서
걸음마 따라가며 시큰둥이다
살청(殺靑)의 세월 거기도 있다는 게지
내 눈은 등 뒤에서도 돋아나고
구름은 수십 번 더 맹목으로 찢긴다
그러면 세상의 근시들은 보게 될까?
제 안의 어떤 허공이
하늘 밖으로도 펼쳐 보이는 푸름을
노자는 “하늘은 하나를 얻으니 푸르름이요 天得一以淸" (노자 39장)라고 했다. 가을 하늘은 푸름의 심연이다. 하늘 밖의 무한 허공을 품어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푸르름! 저 푸른빛의 피안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슬픈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한다. 때는 가을, 바쁜 나날을 헤아려 봐도 내겐 붉은 근심 하나 없을 뿐더러, 나는 담즙을 토해내지도 않고 두통이나 신경쇠약도 없으니까! 가을 근시가 되어 영혼을 단련하고, 목전의 절망과 비참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으련다. 저 하늘의 푸름 아래 고요히 단풍 드는 나무와 숲들, 익어가는 과물(果物)과 들의 곡식들, 그리고 화창하기만 한 당신의 모습만을 보려 한다. <장석주·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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