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가을 소묘-함민복(1962~)

~Wonderful World 2017. 9. 3. 08:37

가을 소묘
-함민복(1962~)
  

 

고추씨 흔들리는 소리
 
 
한참 만에
 
 
에취!
 
 
바싹 마른 고추가
 
 
바싹 마른 할머니를 움켜쥐는 소리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마당가 개도
 
 
취이!
 
 
마주 보는 주름살
 
 
다듬는
 
 
세월
 
 
할머니가 마당가에 쪼그리고 앉아 고추를 말리고 있다. 잘 익은 붉은 고추에 가을볕을 골고루 발라주려고 손으로 헤치고 있다. 적어도 사나흘은 말렸을 것이다. 시인은 그때 바짝 마른 고추씨가 고시랑고시랑 흔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의 귀는 얼마나 밝고 명민한가. 한없이 가벼워진 고추가 할머니를 움켜쥘 수 있는 것은 할머니의 몸도 이미 한없이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마른 고추와 할머니가 동일한 인격체가 되는가 싶더니 마당가 개도 재채기를 통해 현장에 끼어든다. 고추도 할머니도 개도 주름살로 하나가 된다. 주름살은 세월의 고랑에 새겨진 호미자국이다. 주름을 다듬는다는 것은 시간을 함께 견디는 일이다.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