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따뜻한 비 이현승(1973~)

~Wonderful World 2017. 9. 9. 19:38

따뜻한 비
-이현승(1973~)

 
삼촌은 도축업자
사실 피 묻은 칼보다 무서운 건
삼촌이 막 잡은 짐승의 살점을 입에 넣어줄 때
 
입속에 혀를 하나 더 넣어준 느낌
입속에선 토막 난 혀들이 뒤섞인다
혀가 가득한 입으론 아무 소리도 낼 수 없다
 
고기에서 죽은 짐승의 체온이 전해질 때
나는 더운 비를 맞고 있는 것 같다
바지 입고 오줌을 싼 것 같다
 
차 속에 빠진 각설탕처럼
나는 조심스럽게 녹아내린다


네 귀와 모서리를 잃는다
 
삼촌이 한 점을 더 넣어준다면
심해 화산의 용암처럼 흘러내려
나의 눈물은 금세 돌멩이가 될 것 같다
 
 
삼촌은 아무렇지 않게 소년의 입에 익히지 않은 고기 한 점을 넣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년이 느끼는 처참한 공포는 순식간에 소년을 지배한다. 죽은 짐승의 따스한 살을 살아 있는 짐승으로 받아 물었다는 괴로움이 그것이다. 소년은 고기를 씹으면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죽음을 구체적으로 체험한다. 우리는 유년시절에 맞닥뜨린 최초의 공포, 최초의 모욕, 최초의 수치로부터 잘 빠져나오지 못한다. 야리야리한 영혼을 딱딱하게 만드는 폭력의 운전사를 우리는 어른이라 부른다.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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