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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지우개-안도현(1961~)

~Wonderful World 2018. 1. 11. 16:55

분홍지우개 

-안도현(1961~) 

  

분홍지우개로 

그대에게 쓴 편지를 지웁니다 

설레이다 써버린 사랑한다는 말을 

조금씩 조금씩 지워 나갑니다 

그래도 지운 자리에 다시 살아나는 

그대 보고 싶은 생각 

분홍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그리운 그 생각의 끝을 

없애려고 혼자 눈을 감아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워질 것 같습니다  

  

  

화자는 무슨 사고를 치듯 편지에 사랑한다고 ‘써버’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그걸 지운다. 들키면 큰 일 나는 비밀이 생긴 것이다. 사랑은 한없이 설레지만 또 도망치고 싶을 만큼 두렵고 버거운 사태다. 그 감정이 마음의 어디에서 솟는지 우리는 모른다. 떠낸 자리에 금세 괴는 샘물처럼 그리움은 되살아난다. ‘분홍지우개’는 아무것도 지우지 못하는 사랑의 지우개여서, 지우는 것은 사랑을 여기저기 묻히고 칠하는 것과 같다. 시의 아름다운 결구는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혼자서는 수습할 수 없는 곤경이라고. 눈을 감으면 사랑은 대낮처럼 명백해지고 나는 지워져버릴 것처럼 희미하다고. 그래서 이 그리움은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고.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분홍지우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