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가사와 시들

열과(裂果)-안희연(1986~)

~Wonderful World 2018. 12. 18. 17:06

열과(裂果)-안희연(1986~)


이제는 여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흘러간 것과 보낸 것은 다르지만


지킬 것이 많은 자만이 문지기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지기는 잘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래, 다 훔쳐가도 좋아

문을 조금 열어두고 살피는 습관

왜 어떤 시간은 돌이 되어 가라앉고 어떤 시간은

폭풍우가 되어 휘몰아치는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솔직해져야 한다

한쪽 주머니엔 작열하는 태양을 , 한쪽 주머니엔 장마를 담고 걸었다


뜨거워서 머뭇거리는 걸음과

차가워서 멈춰 서는 걸음을 구분하는 일


자고 일어나면 어김없이

열매들은 터지고 갈라져 있다

여름이 내 머리 위에 깨뜨린 계란 같았다


더럽혀진 바닥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여름은 다시 쓰일 수 있다

그래, 더 망가져도 좋다고


나의 과수원

슬픔을 세는 단위를 그루라 부르기로 한다

눈 앞에 너무 많은 나무가 있으니 영원에 가까운 헤아림이 가능하겠다


<창작과 비평 2018 겨울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