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그루터기-박승민(1964~)

~Wonderful World 2019. 3. 31. 10:11
그루터기
-박승민(1964~)
 
시아침 12/1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의 차상위계층 안방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살얼음 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  
 
 
곡식이나 나무를 베어내고 남은 자리를 그루터기라고 한다. 잘려나간 식물의 본적지 같은 곳. 추수 끝난 빈 들판을 지키는 건 그루터기다. 시인은 잘린 벼 밑동을 오래 들여다본 모양이다. 5행에서 논을 갈아엎는 농부가 등장하면서 시는 아연 활력을 충전한다. 그러다가 마지막 6행에서 등짝의 수건 자국을 그루터기로 인식하는 기발한 감각을 보여준다. 발견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는 시인의 눈이 매섭다. 
 
<안도현·시인·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그루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