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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박목월(1915~78)

~Wonderful World 2019. 4. 4. 10:47
왕십리            
-박목월(1915~78) 
 
시아침 12/29

시아침 12/29

내일 모레가 육십인데
나는 너무 무겁다.
나는 너무 느리다.
나는 외도(外道)가 지나쳤다.
가도
가도 
바람이 입을 막는 왕십리. 
 
 
박목월 시인은 한때 원효로에서 왕십리까지 전차로 출퇴근을 했다고 한다. 시는 그런 어느 날의 심경을 적고 있는데, 무엇이 무겁고 무엇이 느리다는 걸까. 이 말들에는 늙어가는 어깨에 짊어진 생계의 무게와 그에 지친 시인의 헝클어진 마음이 스미어 있다. 시인들은 시 이외의 삶을 부차적인 것이라 여기는 때가 많다. 예술은 삶의 일부일 텐데도 어떤 예술가들은 삶을 예술에 통째 바친다. 그러지 못했다는 것, 그것이 ‘외도(外道)’의 뜻일 듯하다. 시에 전부를 쏟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 그도 물론 할 말이 많고 많다. 그러나 그건 다 변명일 뿐이라고, 거친 왕십리 바람이 입을 막는다. 걸음은 더디고 마음은 바쁘지만 그는 이 외롭고 고단한 길에서 돌처럼 침묵한다. 어서 돌아가 불을 밝히고, 밤새워 뭐든 또 써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이영광·시인·고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왕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