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춘분-최하림(1939~2010)
~Wonderful World
2019. 4. 10. 10:22
춘분
-최하림(1939~2010)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날 아침 하도 추워서 큰 소리로 하느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외쳤더니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이 떨어지며 슬픈 소리로 울었다 밤엔 눈이 내리고 강얼음이 깨지고 버들가지들이 보오얗게 움터 올랐다 아이들은 강 언덕에서 강아지야 강아지야 노래 불렀다
나는 다시 왜 이리 봄이 빨리 오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지난 일이 마음 쓰여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큰 소리’로 외쳐 얼음이 깨어졌구나. 천신만고 끝의 기막힌 봄.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구나 이제. 삼가고 전전긍긍함이 이와 같구나. 봄이 행여 날아갈까 봐. ‘왜 이리 봄이 빨리 오지’ 싶어 못 미더운 마음마저 없지 않구나. 봄인가? 춘분을 맞아 나도 조심조심 소리 죽여 혼자 묻는다. 1980년대 후반의 시. 춥고 혹독했던 1970~80년대에도 최하림의 고뇌와 성찰은 신실함을 잃지 않았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춘분
-최하림(1939~2010)

나는 다시 왜 이리 봄이 빨리 오지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지난 일이 마음 쓰여 조심조심 숨을 죽이고 마루를 건너 유리문을 열고 속삭였다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봄이 왔구나 봄이 왔구나라고
‘큰 소리’로 외쳐 얼음이 깨어졌구나. 천신만고 끝의 기막힌 봄. ‘아무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구나 이제. 삼가고 전전긍긍함이 이와 같구나. 봄이 행여 날아갈까 봐. ‘왜 이리 봄이 빨리 오지’ 싶어 못 미더운 마음마저 없지 않구나. 봄인가? 춘분을 맞아 나도 조심조심 소리 죽여 혼자 묻는다. 1980년대 후반의 시. 춥고 혹독했던 1970~80년대에도 최하림의 고뇌와 성찰은 신실함을 잃지 않았다.
<김사인·시인·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춘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