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 - 정현종(1939~)
빈방 - 정현종(1939~)
1
날이 추워지기 전에
도배를 하기로 한다
방 세 개, 마루 천장, 부엌 벽
품삯 재료값 합해서 25만 원
간식이 있으면 된다고.
계산은 위대하다
(예외는 있겠지만)
누구나 계산은 하니까.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다투어
계산을 개탄하는 이유이다
2
책을 모두 내다가
마루에 쌓는다
장작 더미 같기도 하고
성벽 같기도 하며
폐허 같기도 하다
방이 텅 빈다......오오
나는 꽉 찬다
이렇게 좋구나
(설명적이어도 할 수 없느니)
이렇게 좋구나
빈 책장을 향하여 나는
춤을 춘다, 발작적으로
그 빈 서가(書架)를 향하여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빈 걸 끌어안으며, 이렇게
한껏 폭발하는 법열(法悅)이 어디 있느냐
빈 걸 끌어안으며
빈방을 본다
흘러 넘치는 시선으로
책 속의 밤보다 더 깊은
밤을 빈방과 더불어
3
오오 책 없는 데로 가야지
책 대신 손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고
눈을 보이고
가슴이나 볼기짝,
나뭇잎을 보이고
흙이나 하늘
그냥 날기운, 숨결
피와 정액
4
빈 건 무릇 태(胎)이니
책화 종교와 성(性)을 섞어서
폭바시킨다 해도 미치지 못할
우주적인 숨
이땅의 기억의 짐을 별로 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인간의
얼굴과 피와 내장의 숨결
5
인간 해방?
책에서 해방되야지
말에서 해방되야지
이 책에서 저 책으로는 해방 없고
이 말에서 저 말로는 해방 없고
하여간
혓바닥이란 대저 키스할 때 제일 쓸모 있는 것!
할 만한 일 하나를 말하노니
내 피요 살이요 뼈인
꽃 한 송이를 폭발시켜야지!
*프랑스 시인 생 종 페르스의 시 '아나바시스(Anabasis)에는 "이 땅들의 기억의 짐을 로 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라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