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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방 - 정현종(1939~)

~Wonderful World 2021. 1. 13. 06:37

빈방 - 정현종(1939~)

 

1

날이 추워지기 전에

도배를 하기로 한다

방 세 개, 마루 천장, 부엌 벽

품삯 재료값 합해서 25만 원

간식이 있으면 된다고.

계산은 위대하다

(예외는 있겠지만)

누구나 계산은 하니까.

바로 이 점이

사람들이 다투어

계산을 개탄하는 이유이다

 

2

책을 모두 내다가

마루에 쌓는다

장작 더미 같기도 하고

성벽 같기도 하며

폐허 같기도 하다

방이 텅 빈다......오오

나는 꽉 찬다

이렇게 좋구나

(설명적이어도 할 수 없느니)

이렇게 좋구나

빈 책장을 향하여 나는

춤을 춘다, 발작적으로

그 빈 서가(書架)를 향하여 나는

두 팔을 벌리고

빈 걸 끌어안으며, 이렇게

한껏 폭발하는 법열(法悅)이 어디 있느냐

빈 걸 끌어안으며

 

빈방을 본다

흘러 넘치는 시선으로

책 속의 밤보다 더 깊은

밤을 빈방과 더불어

 

3

오오 책 없는 데로 가야지

책 대신 손을 보이고

얼굴을 보이고

눈을 보이고

가슴이나 볼기짝,

나뭇잎을 보이고

흙이나 하늘

그냥 날기운, 숨결

피와 정액

 

4

빈 건 무릇 태(胎)이니

책화 종교와 성(性)을 섞어서

폭바시킨다 해도 미치지 못할

우주적인 숨

이땅의 기억의 짐을 별로 지고 있지 않은*

새로운 인간의

얼굴과 피와 내장의 숨결

 

5

인간 해방?

책에서 해방되야지

말에서 해방되야지

이 책에서 저 책으로는 해방 없고

이 말에서 저 말로는 해방 없고

하여간

혓바닥이란 대저 키스할 때 제일 쓸모 있는 것!

 

할 만한 일 하나를 말하노니

내 피요 살이요 뼈인

꽃 한 송이를 폭발시켜야지!

 

*프랑스 시인 생 종 페르스의 시 '아나바시스(Anabasis)에는 "이 땅들의 기억의 짐을 로 지고 있지 않은 인간'이라는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