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들

우리, 수작酬酌할까요 - 배공순

~Wonderful World 2022. 1. 22. 19:56

우리, 수작酬酌할까요

 

배공순

 

 

 

 

술은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했을까. 신성한 제사에는 술을 올렸고 나라의 경사스러운 잔칫상에도 흥취를 돋우는 술잔이 있었다. 임금은 장원급제한 유생에게 어사주를 하사했고 초례청의 신랑신부도 수줍게 합환주를 나누었다. 잠시 논두렁에 앉아 쉬는 농부들도 걸쭉한 탁주 한 사발에 힘을 냈으니 예부터 사람들 곁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국제회의 테이블에도 건배주를 내놓는다. 건배는 덕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잔을 말리듯 한 번에 마시는 것, 이른바 ‘원샷!’을 말한다. 이 건배는 고대 바이킹족이 처음 시작했고, 당시의 술잔은 대부분 아래쪽이 뾰족해 세워 둘 수 없는 탓에 한 번에 다 마신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반가운 이를 만나면 맥주 한 잔쯤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술을 즐겨서라기보다 약간은 달뜬 듯 솔직해지는 분위기가 좋아서다. 술잔을 주고받는 수작酬酌이라는 것이 서로 사귐을 뜻해 그런지, 설사 첫 대면이라도 술 한잔을 주고받으면 어색함은 어느덧 사라지고 대화에 물꼬가 트이곤 한다. 사극을 보면, 지분거리는 사내를 향해 주막집 주모가 소리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수작은 좋은 의미였건만, 술자리에서 모종의 거래가 오가거나 은밀한 일을 꾸미는 일이 있다 보니 수작질이라는 저급한 말로 변질된 것인지 모를 일이다.

수작하려면 술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예의를 갖추어 따라야 했을 터. 받거나 따르는 태도에서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일의 형편을 따져 어림잡아 헤아리는 것이 짐작斟酌이다. 술은 저마다 취향이 달라서 가득 채우는 걸 좋아하는가 하면, 반 잔 정도면 좋다는 이도 있다. 상대방을 배려해 따라주는 술의 양을 정하는 것이 바로 작정酌定이다. 주량도 마찬가지, 세고 약함이 사람마다 차이가 나는지라 적당히 권해야 하지 않겠는가. 상대방의 주량에 알맞게 술을 건네는 것이 참작參酌이고,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정상참작情狀參酌’이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예전에는 모임에서 술잔을 돌리는 일이 흔했지만 이런 술 문화에도 변화가 생긴 지 오래다. 각자의 잔에 따라주거나 스스로 따라 마시게 되니 이것이 자작自酌이다. 요즘 들어 1인 세대가 부쩍 많아진 데다 코로나 19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혼술’풍조가 늘게 되고 이 혼술이 독작獨酌이다. 힘든 일이 있거나 갈증이 날 때 시원한 맥주캔 하나 ‘톡!’ 따서 홀로 음미하는 것도 나름 괜찮지만, 술이라는 것이 사람을 이어주는 양념이라서 더불어 마시는 대작對酌이 한결 즐겁지 않을까.

 

알게 모르게 우리 일상에 스며있는 이런저런 ‘작’자들과 수작을 부리는데,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사전 예고도 없이 새 근무처에 발령받은 바람에 방대한 조직문화가 낯설었던 내게 친누나처럼 따르며 많은 도움을 주던 H였다.

“누나, 보고 싶은 사람들 얼굴은 좀 보고 삽시다. S형이랑 같이.”

“좋아, 코로나 몰래 만나면 되지 뭐!”

업무강도 세기로 자자하던 부서에서 고생했던 동료들 셋이 만났다. 새벽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어떤 날은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일하다 캔맥주 하나씩을 홀짝대며 정동길 벤치에 몸을 부리기도 했다. 이제는 직위고 직급이고 다 벗어버리고 형, 누나 부르며 어울리는 자유로움이 참 좋다. 다들 ‘위드 코로나’를 기다리다 지쳤던지라 골뱅이무침 한 젓가락에 거품이 봉긋한 맥주잔을 부딪치니 유쾌하기 이를 데 없다.

“계영배戒盈杯를 아시나요?”

묻는 내 말에, ‘축구 경기야, 배구 경기야?’ 딴청을 부린다. 오래전 만들어진 계영배는 과학적이고 특이한 잔이다. 정해진 높이까지만 따라야 마실 수 있게 만들어진 것으로 가득 따르면 술잔 옆에 난 구멍으로 모두 흘러 빈 잔만 남게 된다. 인간의 허망한 욕심을 잠재우고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 이르는 지혜로운 그릇이다.

“그렇다면, 계영배를 기리며 가득 부어 한잔 더 할까?”

어깃장을 놓는 S형의 별스럽지 않은 말에도 하하 호호 웃음이 푸지다.

“조선의 선비들은 술자리가 벌어져 몇 순배 돌면 일어서서 한쪽 다리로 서봤다네요. 균형을 유지하면 더 마시고 중심을 못 잡고 비틀거리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어선 두 남자는 학처럼 외다리로 꿋꿋이 서 있다. 계영배든 선비들의 주도酒道든 간에 오랜만의 즐거운 수작이라 정담 섞인 대작이 무르익어 갈 뿐이었다.

 

술은 왜 마실까. 그저 술이 좋아 마시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술 한 잔을 오작교 삼아 사람 냄새가 좋아서 모여 앉는 것이리라. 술 한 잔에 하루 치의 피로와 삶의 고단함을 날려 버리기 위해, 마음을 섞고 어깨를 곁고 위로받으며 살아갈 힘을 내기 위해…. 찰랑찰랑 채운 마음의 잔을 나누며 서로에게 풀무질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어쩔 수 없는 격리로 헐거워진 관계들, 마음이 허우룩한 그리운 이들에게 어서 청하고 싶다.

“우리, 수작 한번 할까요?”

친구 블로그 '별똥별 이야기'에서 퍼나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