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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고은(1933∼ )

~Wonderful World 2010. 4. 8. 22:02

- 고은(1933∼ )

비록 우리가 가진 것이 없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지는 나무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또한 바람이 일어나서

흐득흐득 지는 잎새를 바라볼 일이다.

우리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물이 왔다가는

저 오랜 썰물 때에 남아 있을 일이다.

젊은 아내여

여기서 사는 동안

우리가 무엇을 가지며 무엇을 안다고 하겠는가.

다만 잎새가 지고 물이 왔다가 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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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일지 않아도 잎새는 지고, 지켜보는 이 없이도 쓸쓸한 바다는 밀물과 썰물로 영원을 교대한다. 자연의 이법 속에서 우리는 가난한 목숨 외에 무엇을 더 가졌다 하겠느냐. 지상의 삶이란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목숨 자체를 누리는 일. 젊은 내외여, 우리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더라도 이미 자연은 우리가 내려놓을 아이들에게도 살아내는 일의 숙명을 가르친다. 우리는 다만 보잘것없음을 겪고 나야 하는 생명이니! <김명인·시인>


물의 꽃 - 정호승(1950∼ )

강물 위에 퍼붓는 소나기가

물의 꽃이라면

절벽으로 떨어지는 폭포가

물의 꽃잎이라면

엄마처럼 섬 기슭을 쓰다듬는

하얀 파도의 물줄기가

물의 백합이라면

저 잔잔한 강물의 물결이

물의 장미라면

저 거리의 분수가 물의 벚꽃이라면

그래도 낙화할 때를 아는

모든 인간의 눈물이

물의 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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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인의 상상력은 무정형의 물에 형태를 부여해 온갖 꽃으로 피어나게 한다. 물을 생명의 근원으로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피워내는 꽃들일 것이다. 물은 계곡과 들판, 도시에서 바다로 흘러가면서 무수한 형상의 꽃들로 태어난다. 물꽃을 피우는 시인은 무에서 유를 불러오는 마술사가 아니라, 천성으로 눈물이 많은 사람이리라.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던 물은 마침내 안타까운 사람의 눈물로 낙화한다. 영롱하게 맺혔다 떨어지는 물꽃이라면 낙화인들 아름답지 않으랴! <김명인·시인>

 

 

쨍한 사랑 노래 - 황동규(1938 ~ )

게처럼 꽉 물고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게 발처럼 뚝뚝 끊어버리고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조용히, 방금 스쳐간 구름보다도 조용히

마음 비우고서가 아니라

그냥 마음 없이 살고 싶다.

저물녘, 마음 속 흐르던 강물들 서로 얽혀

온 길 갈 길 잃고 헤맬 때

어떤 강물은 가슴 답답해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할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흘러내린 자리를

마음 사라진 자리로 삼고 싶다.

내림 줄 그어진 시간 본 적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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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게 발’처럼 움켜쥐려는 사랑의 속성은 전율과 환희조차 갈등으로 끌어안게 한다. 그리하여 날 갠 하늘처럼 먹구름 모두 거두어버린 ‘쨍한 사랑’을 소망하지만, 욕망과 집착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사모의 마음은 답답하게 얽혀들어 “갈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다. 둔치에 기어올랐다가 흘러내린 강물이 ‘내림 줄’을 흔적으로 간직하듯, 떨쳐버려도 사랑의 상처는 끝내 흉터를 남긴다. 비워낸다고 추억조차 지울 수 있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을 송두리째 덜어내는 일이 생각처럼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어서, 이 시는 뭇 사랑 앞에서 더욱 절절하다. <김명인·시인>


난간 - 조원규(1963∼ )

난간이란 것에는

아득한 두근거림이 배어 있다

밤과 낮 쉼 없이

바깥이 흘러오고 부딪고

또 밖을 속삭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 난간들을 만져보려고


나는 무슨 말도 못하면서

적막해져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온 세상과 사람이 난간인 것을 안다

난간 너머엔 부는 바람결 속에

난간 너머로 손을 뻗는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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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간’은 위태로운 가장자리를 둘러막은 울타리지만, 한편 경계를 넘어 새로운 영역에 들도록 이끄는 난관(難關)이기도 하다. 우리는 난관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난간 안쪽에서 무사하려는 갈등을 안고 위태롭게 난간에 기댄다. 흘러가면 새 세상이요, 움츠리면 일상이다. 그 사이에서 두근거리는 것을 난간의 마음이라 불러주면 어떨까. 삶의 경계에 서 본 사람은 안다. 온 세상이 난간이며, 사람들은 모두 저의 난관과 마주쳐야 한다는 것을! <김명인·시인>


난(蘭) - 박목월(1916 ~ 78)

이쯤에서 그만 하직(下直)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하게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스스로 꽃망울을 이루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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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받은 것을 제대로 지키면서 사는 것은 넘치는 욕심이 아니라 천분을 나누는 일이다. 누릴 수 있는 것조차 다 누리지 못한다면 누구나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시인은 주어지는 것조차 덜어내겠다고 말한다. 섭섭하고 애석한 포기로 더 넉넉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난(蘭)은 생존의 조건이 가팔라졌을 때, 향기롭고 품격 있는 꽃을 피운다고 하던가. 그러므로 분수를 지키는 것보다 더욱 어려운, 버릴 줄 아는 삶을 살라는 이 권면은 타인에게 돌리는 충고가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다. <김명인·시인>


입을 다물다 - 이성미(1967∼ )

어디서 올까 그녀의 향기

몸 안에 양귀비꽃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어쩌다 입을 여는데

꽃잎들이 풀풀 나와

그녀와 나 사이를 떠다닌다

이것도 아름답지만

오래도록 그녀는 입을 다물고

그래서 나는 그 옆에 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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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피워대는 것은 꽃나무의 절정(絶頂)일 테지만, 그 꽃을 떠올리며 나무가 꽃피우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꽃피기까지가 두근거리는 기대의 시간이다. 그리하여 개화를 마친 나무에게 다시 오랜 기다림이 갈무리되듯 침묵은 드러내지 않은 경이를 잉태한다. 다 피워서 풀풀 향기 난만한 꽃은 금방 사그라질 아름다움일지 모른다고 ‘양귀비꽃’이 내게 속삭인다. 이 시인은 소리와 침묵 사이에 시를 두려는 것일까. 아직 꽃피우지 않았기에 그녀의 침묵은 활짝 피어날 꽃봉오리를 내내 곁에 두게 한다. <김명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