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온 글들 10

우리, 수작酬酌할까요 - 배공순

우리, 수작酬酌할까요 배공순 술은 언제부터 인간과 함께했을까. 신성한 제사에는 술을 올렸고 나라의 경사스러운 잔칫상에도 흥취를 돋우는 술잔이 있었다. 임금은 장원급제한 유생에게 어사주를 하사했고 초례청의 신랑신부도 수줍게 합환주를 나누었다. 잠시 논두렁에 앉아 쉬는 농부들도 걸쭉한 탁주 한 사발에 힘을 냈으니 예부터 사람들 곁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던 것 같다. 세계 정상들이 모이는 국제회의 테이블에도 건배주를 내놓는다. 건배는 덕담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잔을 말리듯 한 번에 마시는 것, 이른바 ‘원샷!’을 말한다. 이 건배는 고대 바이킹족이 처음 시작했고, 당시의 술잔은 대부분 아래쪽이 뾰족해 세워 둘 수 없는 탓에 한 번에 다 마신 데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반가운 이를 만나면 맥주 한 잔쯤 나누는 것을..

퍼온 글들 2022.01.22

페북에서 퍼왔습니다. 실화랍니다.

이것은 실화다. 얼마 전 이른 아침, 서울 시내버스 안, 기사와 세 명의 승객이 있었다. 50대 신사와 회사원 차림의 젊은이, 중학교 1~2학년쯤 돼 보이는 소녀가 있었다. 한 정류장에서 80세 전후로 보이는 노인이 탔다. 그는 양손에 묵직한 비닐봉지를 끌고 힘겹게 버스에 올랐다. 노인은 “요금이 없어서 미안하다. 조금만 태워달라”며 기사 뒷자리에 걸터앉았다. 기사는 “요금도 없이 버스를 타시면 안 됩니다”면서 “다음 정류에서 내리세요”라고 말했다. 일순 버스엔 긴장감이 돌았다. ▦ 노인은 자리에 제대로 앉지도 못한 채 거듭 “미안하다”고 했고, 기사는 “그러시면 안 된다, 내리시라”고 했다. 여기까진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 중간쯤 앉아있던 소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기사 아..

퍼온 글들 2021.12.19

페가수스의 꿈 - 한영탁

페가수스의 꿈 ​ 한영탁 ​ ​ ​ 이른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눈을 부비면서도 먼저 조간신문부터 찾아 든다. 신문기자로 서른 해 넘게 일하고 퇴직한 지 십 년이 넘었지만 기자 시절의 타성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면 평생 기자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왔다. 좀 더 잘 했더라면 하는 뉘우침과 아쉬움은 많다. 하지만 저널리스트를 생업으로 삼은 데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오래다. 자유로운 사고와 비판 정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더 큰 보상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까. 격동하는 세기 말 한 시대의 증언자가 되었다는 뿌듯한 자부심도 가질 수 있었지만, 기자라는 직업이 천형天刑처럼 괴롭고 아팠던 적도 없지 않았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니, 나를 이런 천직과 천형의 길로 데려다 준 것은 ..

퍼온 글들 2020.09.11

산책 - 맹난자

산책 맹난자 1.눈이 보는 대로 귀가 듣는 대로 마음에 물결이 일 때가 있다. 그런 날은 몸이 벌떡 일어나 마음더러 산책을 나가자고 한다. 동생이 형의 손을 잡아 이끌듯이 몸이 마음을 데리고 집을 나서는 것이다. 중국의 육상신이나 왕명학 같은 심학의 철학가들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몸도 마음을 선도할 수 있는 것 같다. 2.공연히 울적하여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 동네의 목욕탕에라도 들어가 보라. 뜨거운 물에 몸을 한참 담구었다 나오면 마음이 한결 상쾌해지는 것이다. 날씨마저 울듯이 꾸물한 날에는 더운 구들목을 지고 한나절 뒹굴다 보면 마음의 울결도 어느새 풀어지고 만다. 마음이 앓아눕고 싶은 날은 그래서 몸이 먼저 쉰다. 몸이 가벼워지면 마음도 따라서 가벼워지는 것이다. 3..

퍼온 글들 2020.06.17

[이문재의 시의 마음]‘방역 주체’에서 ‘전환 주체’로

손꼽아 세어보니 열 번이 넘는다. 아파트 출입문을 열 때 여섯 번, 집 안으로 들어설 때 또 여섯 번 번호판을 눌러야 한다. 2층에 살아서 엘리베이터 버튼에 손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배달음식이나 택배가 오면 또 긴장한다. 배달하는 분이 마스크를 썼는지 즉각 확인하고 얼른 물건을 받아드는데 그때마다 손잡이 부분이 신경 쓰인다. 밖에서도 마찬가지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마다 예민해진다. 손잡이를 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코로나19 사태가 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일상적 삶은 다름 아닌 손을 매개로 이루어진다는 엄연한 사실을 절감한다. 사회생활이란 수많은 문을 드나드는 것이고, 그 문은 매번 손을 써야 여닫을 수 있다. 과학기술이 진전하면서 손의 역할은 크게 줄었지만, 손이 하는 일은 여전..

퍼온 글들 2020.06.17

[이문재의 시의 마음]“위기를 낭비하는 것은 범죄다”

늦은 밤, 주택가 골목 가로등 아래. 한 사내가 고개를 내밀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지나가던 이웃이 사내를 발견하고 물었다. “뭘 그렇게 찾고 있소?” 그러자 사내가 등 뒤 자기 집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현관 열쇠를 잃어버려서요.” 이웃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아니, 집은 저쪽인데 열쇠를 왜 여기서 찾는 거요?” 사내가 답했다. “여기가 밝잖아요.” 신입생 없는 입학식이 지나고 비대면 온라인 강의도 어느덧 두 달째다. 웨딩드레스처럼 화사했던 벚꽃도 신록에 가려 빛을 잃었다. 환하고 고요해서 가상현실 같은 캠퍼스를 바라보며 팬데믹 이후를 생각한다. 미래의 문을 여는 열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아마 처음일 것이다. 전 세계가 이렇게 ‘하나의 목소리’를 낸 적이 있었던가. 국적과 인종 가릴 것 없..

퍼온 글들 2020.06.17

[이문재의 시의 마음]심청이 아빠에게 한 말

지난 주말 별마당도서관에 다녀왔습니다. 서울 삼성역 가까이에 있는데요, 사진으로만 보다가 직접 가보니 규모가 엄청났습니다. 특히 바닥에서 천장 높이가 어마어마했습니다. 10층 건물 높이쯤 되어 보였습니다. 높이는 깊이의 다른 말이겠지요. 포괄적인 넓이만큼 심층적인 깊이 또한 절실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넓이와 깊이가 교차하는 십자가 같은 걸 떠올려 보았습니다. 강단에 서보니 돔구장 한복판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강연 주제는 ‘관계’로 정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오두막에 있었다는 의자 세 개를 매개로 삼아 ‘나’를 둘러싼 관계를 성찰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소로는 친구가 찾아오면 의자 두 개를 내놓았고 나그네들이 방문하면 의자 세 개를 내놓았답니다. 혼자 있을 때는 의자가 하나만 필요했겠지요. 소..

퍼온 글들 2020.06.17

[이문재의 시의 마음]다시 낙타를 타게 될 것이다

충남 청양군 운곡면 방축길 참동애농원.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더니 도착까지 2시간 남짓. 수도권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증가해 외출을 자제해야 할 때이지만 꼭 가보고 싶었다.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개인 위생수칙을 잘 지키면 별 문제 없으리라 생각하고 차를 몰았다. 서울을 벗어나자 고속도로는 한산했다.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굳이 청양을 찾게 된 계기가 있다. 얼마 전, 아내가 옷가게에서 건구기자를 사온 것이다. 옷가게에서 구기자를? 내가 의아해하자 아내가 답하기를, 옷가게 여주인 아들 부부가 청양에서 구기자농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한쪽 귀로 흘려들었다. 그런데 귀농한 젊은 부부가 음악을 전공했다는 것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던 손으로 농사를 짓다니,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칠갑..

퍼온 글들 2020.06.17

어장(漁場) - 박금아

어장(漁場) 박금아 ​ 친정집에는 작은 유리장이 하나 있습니다. 희부연한 유리창과 빛바랜 나뭇결에서 오랜 세월이 느껴집니다. 친척 아재 손에 들려 우리집 문지방을 넘어오던 때가 오십 년이 지났으니 생애를 같이 한 식구입니다. 기우뚱한 모습은 어머니의 구부정한 어깨를 닮았습니다. 어머니의 여든세 번째 생신날, 육 남매가 모였습니다. 모두 안부를 묻듯이 유리장 앞을 기웃거립니다. 유리장도 침침해진 눈을 껌뻑이며 알은척합니다. 책 한 권을 꺼내어 무르팍 위에 누이고 귓불을 만지작거리면 책이 귀를 열어줍니다. 어머니와 함께 갔던 새벽 바다가 떠오릅니다. 그물을 싣고 돛단배를 저어가면 노 끝에서 바다가 깨어났습니다. 아직 어둑했지요. 어느 날에는 해파리 떼가, 어느 날엔 오징어의 푸른 눈이 뱃길을 안내해주었습니다..

퍼온 글들 2020.0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