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핑 시들...^~ 82

無의 페달을 밟으며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1(유하)

無의 페달을 밟으며 - 자전거의 노래를 들어라1(유하) 두 개의 은륜이 굴러간다 엔진도 기름도 없이 오직 두 다리 힘만으로 은륜의 중심은 텅 비어 있다 그 텅 빔이 바퀴살과 페달을 존재하게 하고 비로소 쓸모 있게 한다 텅빔의 에너지가 자전거를 나아가게 한다 나는 언제나 은륜의 텅 빈 중심을 닮고 싶었다 은빛 바퀴살들이 텅 빈 중심에 모여 자전거를 굴리듯 내 상상력도 그 텅 빈 중심에 바쳐지길 그리하여 세속의 온갖 속도 바깥에서 찬란한 시의 월륜(月輪)을 굴리기를, 꿈꾸어왔다 놀라워라, 바퀴 안의 無가 나로 하여금 끊임없이 희망의 페달을 밟게 한다 바퀴의 내부를 이루는 무가 은륜처럼 둥근, 생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구르는 은륜 안의 무로 현현한 하늘이, 거센 바람이 지나간다 대부믜 날개가 놀다 간다 은륜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 오규원

빈자리가 필요하다 - 오규원 빈자리도 빈자리가 드나들 빈자리가 필요하다 질서도 문화도 질서와 문화가 드나들 질서와 문화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지식도 지식이 드나들 지식의 빈자리가 필요하고 나도 내가 드나들 나의 빈자리가 필요하다 친구들이여 내가 드나들 자리가 없으면 나의 어리석음이라도 드나들 빈자리가 어느 한구석 필요하다

한 걸음 더 - 정끝별(1964~)

한 걸음 더 - 정끝별(1964~) 낙타를 무릎 꿇게 하는 마지막 한 짐 거목을 쓰러뜨리는 마지막 한 도끼 사랑을 식게 하는 마지막 한 눈빛 허구한 목숨을 거둬가는 마지막 한 숨 끝내 안 보일 때까지 본 일 또 보고 끝을 볼 때까지 한 일 또 하고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몰리니까 한 걸음 더 댐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한 줄의 금 장군!을 부르는 마지막 한 수 시대를 마감하는 마지막 한 방울의 피 이야기를 끝내는 마지막 한 문장 알았다면 다시 할 수 없는 일 알았다해도 다시 할 수밖에 없는 일 거기까지 한 걸음 더 모르니까 한 걸음 더 시집 '은는이가' 중에서

가장 높은 탑의 노래 - 랭보(1854~1891)

가장 높은 탑의 노래 - 랭보(1854~1891) 시간이여 오라, 시간이여 오라, 사람 사로잡을 시간이여. 난 그토록 참았고 하여 영원히 잊는다. 두려움과 괴로움이 하늘로 떠나갔다. 그리고는 유해한 목마름이 내 혈맥 어둡게 하네. 시간이여 오라, 시간이여 오라, 사람 사로잡을 시간이여. 망각에 내맡겨진, 향풀과 독보리로 꽃피고, 커진, 더러운 파리들 맹렬하게 윙윙거리는 들판처럼. 시간이여 오라, 시간이여 오라, 사람 사로잡을 시간이여.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중에서

감각 - 랭보(1854~1891)

감각 - 랭보(1854~1891) 여름 야청빛 저녁이면 들길을 가리라, 밀잎에 찔리고, 잔풀을 밟으며. 하여 몽상가의 발밑으로 그 신선함 느끼리. 바람은 저절로 내 맨머리를 씻겨주겠지. 말도 않고, 생각도 않으리. 그러나 한 없는 사랑은 내 넋속에 피어오르리니, 나는 가리라, 멀리, 저 멀리, 보헤미안처럼, 계집애 데려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민음사)'중에서

경주 남산 - 정호승(1950~)

경주 남산 - 정호승(1950~) 봄날에 맹인노인들이 경주 남산을 오른다 죽기 전에 감실 부처님을 꼭 한번 보고 죽어야 한다면서 지팡이를 짚고 남산에 올라 안으로 안으로 바위를 깎아 만든 감실 안에 말없이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바라본다 땀이 흐른다 허리춤에 찬 면수건을 꺼내 목을 닦는다 산새처럼 오순도순 앉아있다가 며느리가 싸준 김밥을 나누어 먹는다 감실 부처님은 빙긋이 웃기만 할 뿐 말이 없다 맹인들도 아무 말이 없다 해가 지기 전에 서둘러 내려 오는 길에 일행 중 가장 나이 많은 맹인 노인이 그 부처님 참 잘생겼다 하고는 캔서아다를 마실 뿐 다들 말이 없다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나무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나는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가 더 아름답다 곧은 나무의 그림자보다 굽은 나무의 그림자가 더 사랑스럽다 함박눈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그늘져 잠들고 싶은 사람들이 찾아와 잠이든다 새들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곧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나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굽은 나무는 자기의 그림자가 구부러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탄다'중에서

벼락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벼락에 대하여 - 정호승(1950~) 벼락맞아 쓰러진 나무를 보고 처음에는 무슨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나보다 하고 생가했다 그러나 이듬해 봄날 쓰러지 나무 밑동에서 다시 파란 싹이 돋는 것을 보고 죄 많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나무가 벼락을 맞는다는 것을 나무들은 일생에 한번씩은 사람들을 위해 벼락을 맞고 쓰러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은 누가 나무를 대신해서 벼락을 맞을 수 있겠느냐 오늘은 누가 나무를 대신해서 벼락맞아 죽을 사람이 있겠느냐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중에서

밥그릇 - 정호승(1950~)

밥그릇 - 정호승(1950~) 개가 밥을 다 먹고 빈 밥그릇의 밑바닥을 핥고 또 핥는다 좀처럼 멈추지 않는다 몇번 핥다가 그만둘까 싶었으나 혓바닥으로 씩씩하게 조금도 지치지 않고 수백번은 더 핥는다 나는 언제 저토록 열심히 내 밥그릇을 핥아보았나 밥그릇의 밑바닥까지 먹어보았나 개는 내가 먹다 남긴 밥을 언제나 싫어하는 기색없이 다 먹었으나 나는 언제 개가 먹다 남긴 밥을 맛있게 먹어보았나 개가 핥던 밥그릇을 나도 핥는다 그릇에도 맛이 있다 햇살과 바람이 깊게 스민 그릇의 밑바닥이 가장 맛있다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