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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지 1 -조정권 (1949 ∼ )

~Wonderful World 2010. 4. 9. 21:58

백지 1 -조정권 (1949 ∼ )

 꽃씨를 떨구듯

적요한 시간의 마당에

백지 한 장이 떨어져 있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이 놓고 간 물음.

시인은 그것을 10월의 포켓트에 하루 종일 넣고 다니다가

밤의 한 기슭에

등불을 밝히고 읽는다.

흔히 돌보지 않는 종이이지만

비어 있는 그것은 신의 뜻.

공손하게 달라 하면

조용히 대답을 내려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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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절절한 물음에 스스로 대답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 바탕을 진실로 깨끗한 백지로 남겨두어야 한다. 이미 많은 것을 옮겨 심어 어지러운 미망(迷妄)에는 말씀이 씨로 내린들 신(神)의 꽃씨 싹 틔울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생의 신음은 절절한 간구에도 기록되지 못하니, 백지를 앞질러 모두 경작해버린 탓이다. 공손함조차 저버린 욕망으로 빼곡 채운 어지러운 마음을 받아 든들 누가 그걸 읽어낼 수 있으랴! 시를 향한 외로움이 백지 위에 그리운 말씀들이 내려앉게 한다. <김명인·시인>

 

기억 저편 - 윤성택(1972∼ )

한 사람이 나무로 떠났지만

그 뒷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처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

어쩌면 나는 그때 이미 떠난 그였고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는지 모른다

떠난 그가 남긴 유품을 새벽에 깨어


천천히 만져보는 기분,

길을 뒤돌아보면

그를 어느 나무에선가 놓친 것도 같다

나는 얼마나 멀리 떠나온 것일까

살아간다는 것은 온 신경을 유목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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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떠난 그를 더 멀리 떠나가지 못하게 가까운 나무 아래 묻었는가 보다. 나무가 한 자리에 붙박이듯 이 수목장(樹木葬)은 살아 떠도는 사람들도 한 그루의 나무처럼 멈춰 세우지만, 떠난 사람은 떠난 사람, 누구도 더 이상 옛 나무에게로 돌아서지는 않는다. 그런데 그는 어디에나 흔한 나무들처럼, 시도 때도 없이 깔리는 안개처럼, 무수히 편재하는 사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불러 세운다. 기억이라는, 천지에 미만한 저 그리움으로! <김명인·시인>


휘파람 - 하재연(1975 ~ )

그림자들이 여러 개의 색깔로 물든다

자전거의 은빛 바퀴들이 어둠 속으로 굴러간다

엄마가 아이의 이름을 길게 부른다

누가 벤치 옆에

작은 인형을 두고 갔다

시계탑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비둘기,

공기가

짧게 흔들린다

벤취, 공원, 저녁과는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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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으로 내다보이는 근린공원이 여느 날처럼 저녁 어스름에 파묻히고 있다. 무심한 일상은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내력들을 흩어놓는데, 내 것으로 얽어맬 수도 없는 나의 하루, 도대체 어느 일생 속의 한 때일까. 시간의 틈새에 비벼 넣은 듯 풍경은 ‘휘파람’ 소리처럼 휘발해 가고, 공원은 어느새 텅 비어 허전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저녁과도 ‘상관없이’ 아프다. <김명인·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