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도에서곽재구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실비 속으로
연안 여객선이 뱃고동과 함께 들어오고
붉은 꽃망울 속에
주막집 아낙이
방금 빚은 따뜻한 손두부를 내오네
낭도섬에서 빚었다는 막걸리맛은 융숭해라
파김치에 두부를 말아 한입 넘기는 동안
붉은 꽃망울 안에서
아낙의 남정네가 대꼬챙이에
생선의 배를 나란히 꿰는 걸 보네
운명의 과녁을 뚫고 지나가는 불화살
늙고 못생긴 후박나무 도마 위에 놓인
검은 무쇠칼이 무심하게 수평선을 바라보는 동안
턱수염 희끗희끗한 사내가
추녀 아래 생선꿰미를 내걸고 있네
작약이 피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뜨거운 일
물새 깃털 날리는 작은 여객선 터미널에서
계요등꽃 핀 섬과 섬으로 연안 여객선의 노래는 흐르고
대꼬챙이에 일렬로 꿰인 바다
핏기 말라붙은 어족의 눈망울 속
초승달이 하얗게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네
ㅡ 《창작과 비평》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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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 1954년 광주 출생. 1981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사평역에서』『전장포 아리랑』『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현재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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