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연필을 깎다 - 오종문(1959~ )

~Wonderful World 2014. 4. 9. 13:34

연필을 깎다 - 오종문(1959~ )

 

뚝! 하고 부러지는 것 어찌 너 하나뿐이리
살다보면 부러질 일 한두 번이 아닌 것을
그 뭣도 힘으로 맞서면
부러져 무릎 꿇는다

누군가는 무딘 맘 잘 벼려 결대로 깎아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불멸의 시를 쓰고
누구는 칼에 베인 채
큰 적의를 품는다

연필심이 다 닳도록 길 위에 쓴 낱말들
자간에 삶의 쉼표 문장 부호 찍어놓고
장자의 내편을 읽는다
내 안을 살피라는

-----------------------------------------------------------------------------------------


요즘 대부분의 시인들은 컴퓨터로 시를 씁니다. 하지만 옛날에는 모두 연필로 글을 썼지요. 사각사각 연필을 깎으면 향나무 냄새가 났지요. 결대로 잘 깎아낸 연필을 요리조리 살펴보며 온 정성을 다하여 심을 벼렸지요. 소설가 김훈은 “연필로 쓰면, 내 몸이 글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 든다” 며 지금도 연필로 글을 쓰고 있다지요. 그러나 연필을 깎는 것에도 양가성이 있어 ‘누군가’에게는 ‘모두에게 희망을 주는 불멸의 시를 쓰게’ 하기도 하고 ‘누구’에게는 ‘칼에 베인 채 큰 적의를 품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뚝! 하고 연필이 부러져도, 그래서 왼손 엄지를 잘 밀어 연필을 깎다 칼에 베어도, 그건 연필의 잘못은 아니군요. ‘장자의 내편’을 읽고 ‘내 안을 살피라’고 하는 것을 보면요. 툭하면 품었던 값싼 적의를 서둘러 거두어야겠습니다. <강현덕·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