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김광규(1941~ )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공통적인 것’(A 네그리)에서 ‘개별적인 것’으로의 전이(轉移)를 의미한다. 게다가 그 개별적인 것은 화석처럼 굳어져 다시는 공통적인 것으로 귀환하지 않는다. ‘늙음’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공통의 이름’이 없는 관계는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김광규(1941~ )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공통적인 것’(A 네그리)에서 ‘개별적인 것’으로의 전이(轉移)를 의미한다. 게다가 그 개별적인 것은 화석처럼 굳어져 다시는 공통적인 것으로 귀환하지 않는다. ‘늙음’이라는 것 외에 아무런 ‘공통의 이름’이 없는 관계는 얼마나 무미건조한가.
<오민석·시인·단국대 영문학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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