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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도귀례(1944~ )

~Wonderful World 2018. 1. 9. 09:41
가을걷이            
-도귀례(1944~  )  
 
시아침


묏똥 앞에 땅이 남아
세 고랑 밭을 만들었는데
곡식 벌이해서
짐승 좋은 일만 했네
애초기로 친 것만치로
야물딱지게 뜯어먹어 버렸네
자근자근 빠마볶아 먹은 것처럼
먹어버렸네
 
돈 고까진 것
안 벌어도 살고
없어도 사는 것이지만.  
      
     
정말 하고 싶은 말, 그러니까 진심은 본래 말끔히 다 털어 내놓을 수 없는 말 같다. 말을 해도 속이 후련치 않고 응어리가 안 풀린다면, 바로 그 상태 속에 진심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부자건 가난뱅이건 욕심쟁이건 자선가건 다 돈을 좋아한다. 형편은 제각각이지만 돈 없인 살 수가 없어서다. 무덤 곁 ‘세 고랑’ 밭에 곡식을 심어 그 좋은 돈 얼마로 바꿔보려 했는데, 말짱 헛일이 되었다. 울화와 허탈이 첫 연의 생생한 묘사를 낳았다. 마음을 더 잘 말하기 위해 도귀례 시인은 ‘애초기’와 ‘빠마’와 같은 입말의 비유를 활용하였다. 태연을 가장한 결구의 허세는 진심의 반의반도 안 된다. 진심의 대부분일 아까움과 속상함은 행간에 숨어 오히려 더 역력히 드러난다.
 
<이영광 시인·고려대 문예창작과 교수> 

[출처: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 가을걷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