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 도종환(1954∼ )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
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
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
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
더 깨끗하고 고운 잎을 만들고 지키기 위해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
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
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
그나마 오래오래 푸르른 날들을 지켜온 저들을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
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
잠시 옛날을 기억하게 할 짧은 허기를 메우기 위해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겨울 마파람이 부는 저녁, 시래깃국이 들어오곤 했다. 된장에 무친 시래기 위로 들깻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오래된 토방 냄새 같기도 하고 외지로 벌이 갔다 온 아버지 냄새 같기도 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할아버지에게 시래깃국만 드리는 것이 어머니는 늘 미안한 눈치였다. <신용목·시인>
2009.01.12 01:19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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