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욕’- 이문재(1959∼ )
달빛에 마음을 내다 널고
쪼그려 앉아
마음에다 하나씩
이름을 짓는다
도둑이야!
낯선 제 이름 들은 그놈들
서로 화들짝 놀라
도망간다
마음 달아난 몸
환한 달빛에 씻는다
이제 가난하게 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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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도록 틀어놓은 샤워기. 속옷처럼 마음을 벗을 줄 아는 사람만이 사용할 수 있는 샤워기. 꼭지가 빙빙 도는 샤워기. 천장 타일로 북두칠성을 붙여놓은 욕실을 가진 시인이 있다. 이왕이면 공중탕이면 좋겠다 생각도 해보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가난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떼를 써서라도 꼭 한번은 같이 가보고 싶다. 마음 한 벌씩 벗을 때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주는 라커룸. 등을 밀어주고는 철썩 손자국을 남길 것이다. 열탕 안에서 마음 도둑이 되는 비법을 들을 것이다. 환한 샤워기를 달아준 설비집은 어느 시집 속에 점포를 열었을까. 때타월 바람은 내가 챙겨갈 것이다. <신용목·시인>
‘감나무 새순들’-정진규(1939~ )
눈 뜨는 감나무 새순들이 위험하다 알고 보면 그 밀고 나오는 힘이 억만 톤쯤 된다는 것인데 아기를 낳는 여자, 그 죽음 직전, 직전의 직전까지 닿아 있는 힘과 같다는 것인데 햇살 속에 반짝이는 저 몸짓들이 왜 저리 연하디연할까 다를 게 없다 가장 힘센 것은 가장 여린 것을 겨우 만들어낸다 억만 톤의 힘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처음부터라야 완벽하다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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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만 톤의 힘은 모두 ‘처음’에서 비롯되는 것. 우리의 삶이 완벽한 이유도 순간순간이 모두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본 날 나는 더없이 위험해졌습니다. 영혼에서부터 솟구친 억만 톤의 힘이 내 마음의 싹을 밀어 올렸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향해 자라나는 초록들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연하디연한 것들이 내 삶을 조종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감나무 새순을 보며 서둘러 나는 연시 두 개를 꺼내 들고 당신의 방문을 두드릴 날을 생각합니다. <신용목 시인>
2009.02.27 01:04 입력
2009.02.26 01:11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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