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가을길’ - 조병화(1921 ~ 2003)

~Wonderful World 2010. 9. 11. 08:14

‘가을길’ - 조병화(1921 ~ 2003)

 


맨 처음 이 길을 낸 사람은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나보다 먼저 이 길을 간 사람은

지금쯤 어디를 가고 있을까

이제 내가 이 길을 가고 있음에

내가 가고 보이지 않으면



나를 생각하는 사람, 있을까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길은 이어지며

이 가을,

어서 따라오라고

아직, 하늘을 열어놓고 있구나



가을이네요. 길 하나 만들 그런 날씨, 길들이 모두 숨어 있다가 흐리게 웃으며 가을 숲에서 슬몃슬몃 걸어 나오는 것 같네요. 거기 분명 누군가 있을 겁니다. 그 길 위에 그 사람은 하늘을 열고 가을의 생각을 열며, 그리고 ‘그리움으로 그리움으로’ 그리움을 열 것입니다. 그런 다음, 가을 숲에서 나온 익명의 그 사람은 쓸쓸하디 쓸쓸하게 자기의 등을 내밀 것입니다. ‘어서 업히라’고 손짓할 것입니다. 가을엔 당신의 그림자가 어룽거리는 창마다 두드리는 그 손짓의 선물을 받으세요. 생명이라는 긴 손짓의 선물. 무한 증식의, 시라는 선물과 함께. <강은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