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지마라
폐사지처럼 산다
요즘 뭐하고 지내느냐고 묻지 마라
폐사지에 쓰러진 탑을 일으켜세우며 산다
(중략)
기끔 웃으면서 라면도 끓여먹고
바라과 풀도 뜯어먹고
부서진 석종에 불이나 켜며 산다
부디 어떻게 사느냐고 다정하게 묻지 마라
너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고
거짓말도 자꾸 진지하게 하면
진지한 거짓말이 되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입도 버리고 혀도 파묻고 폐사지처럼 산다
-정호승님의 '폐사지처럼 산다'의 일부
'이슬비 이용법'-강형철(1955~)
남대문시장 싸여진 택배물건사이
일회용 면도기로 영감님 면도를 하네
비누도 없이 이슬비 맞으며
쪽에 힘을 주며
얼굴에 길을 만드네
오토바이 백미러가 환해지도록
리어카 물건들
비 젖어 기다리네
영감님 꽃미남 될 때까지
가로수는 누가 볼까 팔을 벌리고
사람들은 우산쓰고
찰박찰박 걸어가는데
불탄 남대문 오랜만에 크게 웃고
'사라진 야생의 슬픔'-박노해(1957~)
산들은 고독했다
백두대간은 쓸쓸했다
제 품에서 힘차게 뛰놀던
흰 여우 대륙사슴 반달곰 야생 늑대들은 사라지고
쩌렁 쩡 가슴 울리던 호랑이도 사라지고
아이 울음소리 끊긴 마을처럼
산들은 참을 수 없는 적막감에
조용히 안으로 울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산들은 알아야만 했다
사라진 것은 야생 동물만이 아니었음을
이 땅에서 사라진 야생 동물들과 함께
야생의 정신도 큰 울음도 사라져버렸음을
허리가 동강 난 나라의 사람들은
다시 제 몸을 동강 내고 있다는 걸
산들은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조용히 안으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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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적이 사라져버린 하늘이 참새들을 절망케 한다. 매서운 부리 앞에서 참새들은 어쩌면 살아있는 자신의 심장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산에 들어도 산에서 우리는 그 어떤 두려움도 느낄 수 없다. 오싹 머리 끝이 쭈뼛해오는 그 싱싱한 공포감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우리가 야생을 노래하는 것은 야생의 눈망울에 비친 하늘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손택수.시인>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도종환(1954~)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자꾸만 거창해지즞 쪽으로
끌려가는 생을 때려 엎어
한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그 여자 얇은 아래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내 몸의 현들을 그년가 천천히 긋고 가
(중략)
바이올린 소리의 발밑에
동전바구니로 있어도 좋겠다
거져 던져 주고 간 몇 잎의 지폐를 들고
뜨끈한 국물이 안경알을 뿌옇게 가리는
포장마차에 들러 후후 불어
밤의 온기를 나누어 마신 뒤
팔짱을 끼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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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디가난한 현과 현 사이의 공간이 떨린다. 이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음이 울
리는 것이리라. 누가 바이올린은 어떻게 해서 발명되었느냐고 물으면, 이 시를 들려
주리라. 작고 단출한 행장으로 그녀의 아래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고 싶은 꿈,
모든 시는 결국 낭만적인 정신의 소산이다.
<손택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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