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치를 입는다'-김경주(1976~)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 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 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수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중략)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뚝뚝 떨어진다
눈덩이만 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엄겨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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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쪼글쪼글 시들어가고 있으나 어머니의 꽃은 아직 시들지 않았다. 낡은 팬티 속으ㅟ 꽃, 수줍은 봄처녀의 하늘하늘한 맵시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 꽃, 이 꽃물이 번져 눈을 뚫고 포근한 햇볕이 오는 것이리라. 시장 리어카 상품이 어머니로 하여 최고의 브랜드가 되었다.
<손택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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