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박순원(1965~ )
내가 가지고 다니는 전화기는
가짜다 나는 전화기를 척 꺼내서
뭐라고뭐라고 떠드는데 다
거짓말이다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전화기에서도 무슨
소리가 난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
나의 아내가 다 녹음시켜 놓은 것이다
카메라도 달렸는데 물론 가짜다
내가 찍는 시늉을 하면 아내가
밤새 저장해놓은 그림이 뜬다 나는
하루종일 돌아다니다가 집에 들어가
전화기를 충전기에 꽂아놓고
옷을 벗고 쉰다 충전이 되는 동안
자동으로 녹음이 되는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아내가 비싼 값을 주고
프로그램을 깔았을 것이다 (중략)
아내는 밤새 제 것 내 것 다
녹음하느라 부지런은 혼자 다
떨어놓고 겨우 일어나는 것처럼
부스스 고개를 든다
잘 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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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에 사로잡힌 남자의 고백이다. 자기가 아내 손바닥 위에 있다는 거다. 그런데 가만 보면 그 아내, 참 부지런하다. 밤새 나 몰래 “제 것 내 것” 다 세팅해 두고, 아침에는 부스스한 얼굴로 고개를 든다. “잘 잤어?” 눈곱 낀 그녀 얼굴에서 사랑을 느낀 적이 있다면, 우리 모두는 음모론의 희생자다. 이 남자의 속내란 이런 것. 아내에게 꼭 안겨서 살래. 그거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할래. 이 시에는 보너스트랙이 있다. 제목이 해바라기의 노래 ‘사랑으로’의 첫 소절이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하나 있지. 오늘 아침, 머리맡에서 그 일을 하셨는지? 기분 좋은 시로 첫 인사를 드린다. <권혁웅·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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