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랑 - 김명인(1946~)
통발 심으러 가는지
어선 한 척 파도가 들썩일 때마다
이물을 한껏 높였다가 물이랑 속으로 구겨 박힌다
하루 종일 마늘쪽 놓느라
늦가을 햇살 수그린 줄 모르고
외딴섬 쓸리는 비탈 밭고랑 사이로
이따금씩 고개 내미는 저 할매
파도 기슭이라 파 뿌리마저 다 심어버렸나
뭍에서 보면 수평선은 한 줄 금이지만
수만 너울을 겹친 그 너머 분명히 있다
끝내 고랑을 타고 넘는 저 할매처럼 노을처럼
처녀비행에 나선 어떤 새들 빠져 죽기도 하는 곳!
배를 몰고 섬 사이를 지날 때
어디서 흘러오는 수수께낀가
물이랑 넘실대는 흰 부표들
통발 달아 내린 자리들을 표시하지만
모든 무덤들도 부표를 띄워
거기가 주검 자리임을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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뭍에서 보면 수평선은 한 줄 금이고, 멀리서 보면 우리 인생도 한 떼기 밭고랑, 어떤 새는 처녀 비행하다 거기 빠져 죽기도 하고. 고랑에 엎드린 노파처럼 어선 한 척 까딱거리며 가는데, 저 아득함 어디서 온 수수께끼인지? 넘실대는 부표는 통발 자리라는 표시인데 사실 무덤자리도 누군가 죽은 자리라는 표시. 그런데 끝내 고랑을 타고 넘는다는 저 할매, 어쨌든 살아냈으니 저 인생도 시시포스(Sisyphus)처럼 평생 밭고랑과 싸워 이긴 승자 아닌가. <최정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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