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가을에 만나요 - 이장욱(1968~ )

~Wonderful World 2012. 3. 15. 19:27

가을에 만나요 - 이장욱(1968~ )

오늘은 인형처럼 걸어다녔다

광화문에서는 관절이 부드럽게 회전하였다

종로에서는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나의 완성을 모두가 용서하였다

견고한 삶이 시작되자

나는 무한히 순결하였다

벌거벗는 것이 좋아

매우 아름다운 것도 좋지

나는 남의 사생활을 금방 잊을 수 있다

나는 어떤 편향도 없다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조용히 멈출 수 있다

사랑을 위해 옷을 갈아입었지만

혜화동의 가을은 정기적으로 흘러가고

생각은 플라스틱처럼 휘어졌다

네거리에서 좌회전하여 편의점이 보이자

나는 정지하여 당신을 기다렸다

드디어 당신의 미소를 느끼며

나는 전진하였다

당신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는 내가 아니라 인형인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눈꺼풀을 올리고 관절을 돌린다. 난 어떤 편향된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형이니까, 쓸데없는 무슨 말인가 흘러나오려는 순간에 조용히 멈출 수가 있다. 인형처럼 순결하고 벗는 것도 좋아하고 아름다운 것도 좋아한다. 인형처럼, 그렇게 살면 훨씬 조용하고 간결하게 살 수가 있을 텐데…. 가을이 흘러가듯 내 생각도 플라스틱처럼 휘어져 흘러간다. 난 정말 내가 아니라 누군가의 조작에 의해 살아가는 인형인지도 모른다. <최정례·시인>

 

흙의 조직을 와해시키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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