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민달팽이 - 김신용(1945~ )

~Wonderful World 2012. 10. 24. 00:56

민달팽이 - 김신용(1945~ )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을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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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우면 더워서 문제요, 추우면 추워서 문제다. 아프면 아파서 문제요, 안 아프면 또 그것이 문제다. 돈이 없어서 문제요, 또 많아서 문제다. 집도 절도 없이 오직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 년 가까이 살아본 적이 있다. 그들은 행복을 내일의 이마에 걸어두지 않은 채 오직 걸어가는 그 걸음에 몸과 마음을 두었다. 그들을 떠나올 때,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을 보았고, 그 내려놓지 못한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려놓지 못하는 내가 거기 있었고, 또 여기 있다. “치워라, 그늘!” 날마다 치우지 못한 그늘이 새록새록 무겁다. 이 또한 지고 가리라. (장철문·시인·순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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