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달팽이 - 김신용(1945~ )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띤,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을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衲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잎사귀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
더우면 더워서 문제요, 추우면 추워서 문제다. 아프면 아파서 문제요, 안 아프면 또 그것이 문제다. 돈이 없어서 문제요, 또 많아서 문제다. 집도 절도 없이 오직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일 년 가까이 살아본 적이 있다. 그들은 행복을 내일의 이마에 걸어두지 않은 채 오직 걸어가는 그 걸음에 몸과 마음을 두었다. 그들을 떠나올 때, 내가 내려놓지 못한 것을 보았고, 그 내려놓지 못한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내려놓지 못하는 내가 거기 있었고, 또 여기 있다. “치워라, 그늘!” 날마다 치우지 못한 그늘이 새록새록 무겁다. 이 또한 지고 가리라. (장철문·시인·순천대 교수)
'중앙일보-시가 있는 아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말벌을 기리는 노래 - 김진경(1953~ ) (0) | 2012.11.06 |
---|---|
동원(東園)에서 국화를 보며 - 백거이(772~846) (0) | 2012.10.30 |
시월-이시영 (0) | 2012.10.08 |
무화과-김지하(1941~) (0) | 2012.10.05 |
단풍-박형준(1966~) (0) | 2012.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