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의 칼 - 남진우(1960~ )
문득 책을 펼치다
날선 종이에 손을 베인다
얇게 저민 살 끝에서 피가 번져나온다
저릿한 한 순간,
숨을 들이쉬며 나는 깨닫는다
접혀진 책장 곳곳에 무수한 칼날이 숨겨져 있음을
책은 한 순간의 번득임으로 내 머리를 절개한 뒤
어느새 낯선 말들을 밀어넣고 닫혀버린다
금속성의 외침이 큰골 작은골 사이를 꿰뚫고 지나간다
하여 깊은 밤 책을 덮으며 나는
작은 전율과 함께 뒤늦게 깨닫는다
아무리 고개를 내저어도 이미 머릿속에 들어온 칼날은
쏟아버릴 수 없다는 것을 날선 종이들이
두개골 속에서 부스럭거릴 때마다
터질 듯한 아픔으로 신음하며
컴컴한 벽에 온몸을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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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책을 읽다가 날 선 종이에 손을 베인다. 쓰리고 아프다. 오랫동안 책에 숙달된 사람도 예외 없이 겪는 일이다. 살 끝에서 번지는 붉은 피를 보며 시인은 책을 읽는 것 또한 이와 같다고 깨닫는다. 책장 곳곳에 무수한 칼날이 숨겨져 있고, 책의 칼날들은 한순간 번득임으로 머리를 절개한 뒤 낯선 말들을 밀어 넣고 닫혀버린다. 금속활자로 된 칼날은 큰골과 작은골 사이를 꿰뚫고 두개골 속에서 부스럭거린다. 다시 쏟아버릴 수 없는 머릿속의 칼날이 동반하는 터질 듯한 아픔과 신음. 깊은 고뇌와 함께 컴컴한 벽에 온몸을 부딪쳐야 하는 숙명을 떠맡아야 하는 시인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남진우 시인을 오랫동안 알고 지내지만 그의 시를 읽을 때면 ‘불현듯 낯선 얼굴과 마주치’는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 그의 이런 모습 때문일까. (곽효환·시인·대산문화재단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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